WISE THEME

JOURNEY

SEP-OCT 2020​

캔버스를 수놓은 타히티

흑단 같은 머릿결과 구릿빛 피부의 폴리네시안 여인은 폴 고갱의 뮤즈로 빛났고, 에메랄드빛 바다는 ‘마티스 블루’의 영감이 되어 앙리 마티스의 캔버스를 물들였다. 태초의 땅과 바다가 어우러진 타히티는 자연이 만든 불멸의 걸작 그 이상이다.

Writer 이은혜(칼럼니스트) Editor 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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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낯선 단어 폴리네시아(Polynesia)는 남태평양에 흩어진 수천 개의 섬들을 총칭한다. 하와이를 비롯해 뉴질랜드, 사모아, 이스터 섬 등에 살던 폴리네시안은 태평양을 주름잡으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뛰어난 항해술 덕분에 그들은 수천 년 전, 미지의 세계를 찾아 바다를 누빈 인류 최초의 항해자였다. 수천 개의 섬 중 남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118개의 섬은 프렌치 폴리네시아에 속한다. 1884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후 지금은 자치권을 행사하는 프랑스령으로, 정식 명칭은 주도인 타히티를 중심으로 한 ‘타히티의 섬들(The Islands of Tahiti)’이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한쪽 끝부터 다른 쪽 끝까지 연결하면 2,000㎞에 달할 만큼 광활한 탓에 118개의 섬들은 5개의 제도로 묶여 공존한다.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평온한 은둔의 삶을 살던 폴리네시안 문화는 유럽인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며 변혁을 맞는다. 이국적인 정취에 매료된 유럽인들은 타히티로 몰려들었고, 예술가 또한 이 대열에 합류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폴 고갱과 앙리 마티스다. 타히티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은 그들은 캔버스 위에 눈부신 원색의 향연을 펼치며 ‘색채의 마술사’가 되어 우리 곁에 남았다.

자연이 품은 색 그리고 빛의 잔치

빛은 생명을 잉태하고 색을 발현시킨다. 빛이 강할수록 색은 더 짙어지고, 생명력도 강인해진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빛이 진초록의 숲을 이루고, 천사의 눈물처럼 투명한 바닷물이 넘실대는 타히티는 그리하여 ‘낙원’, ‘천국’과 같은 신의 영역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타히티 여행의 첫 관문은 국제공항이 자리한 파페에테(Papeete)다. 프렌치 폴리네시아 가운데 유일하게 번화한 도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타히티의 수도다. 오래전부터 유럽인들의 휴양지로 개발된 탓에 편의시설은 물론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제법 많다. 150년 전통을 지닌 파페에테 마켓은 타히티 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집합소다.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품과 특산품인 바닐라와 흑진주, 과일, 생선 등 관광객을 위한 눈요깃거리와 현지인의 평범한 일상이 교차한다. 컬러풀한 꽃잎을 엮어 만든 화관을 쓴 상인부터 화려한 문양이 프린트된 원피스를 입고 장을 보는 현지인을 구경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한참 시장을 구경하다 보면 온몸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피어난다. 타히티에서만 자생하는 ‘티아레 타히티’ 향기다. 언뜻 백합 향을 닮은 티아레 타히티는 현지인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다. 환영의 의미로 손님에게 순백의 티아레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머리카락이나 몸에 윤기를 더하는 모노이 오일을 즐겨 바른다. 코코넛 오일에 티아레 꽃향기를 더한 모노이 오일은 타히티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쇼핑 목록 1순위다. 마켓 주변으로 타히티의 첫 가톨릭교회인 노트르담 성당과 학교, 은행, 레스토랑 등 편의시설이 모여 있다. 특히 수준급의 화려한 그라피티가 눈에 띄는데, 담벼락이며 건물 외벽마다 창의적인 그라피티로 가득하다.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페스티벌 작품으로, 길거리표 아트 갤러리인 셈이다. 도시의 나이트라이프가 펼쳐지는 바이에테 광장은 오후 6시가 되면 푸드 트럭이 불을 밝힌다. 감자튀김을 가득 올린 햄버거부터 타이 음식, 중식, 타히티 전통 음식 등 다채로운 저녁 식사를 풍성하게 즐기기 좋다. 타히티 섬 안쪽으로는 울창한 원시림이 숨 쉰다. 해발 2,2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굽이굽이 이어져 열대우림과 깊은 계곡을 이룬다. 사륜구동 자동차를 타고 산악지대를 누비는 투어도 다양하다. 그러나 역시 타히티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파란빛이 넘실대는 바다다. 테아후푸(Teahupo’o)는 파도를 향해 뛰어드는 서퍼들의 놀이터다. 타히티 사람들에게 서핑은 마치 걸음마를 떼듯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놀이, 그리고 문화다. 서핑이 언제,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지만 하와이나 타히티에 살던 고대 폴리네시아인들로부터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테아후푸는 세계 3대 서핑 대회 중 하나인 빌라봉 프로 타히티(The Billabong Pro Tahiti)가 열릴 만큼 유명한 서핑 명소로, 특히 8월에는 괴물 같은 파도가 밀려들어 서퍼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

영감의 안식처에 잠든 폴 고갱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폴 고갱은 타히티를 사랑한 대표적인 예술가다. 그에게 타히티는 영혼의 안식처이자 유토피아였다. 불운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던 고갱이 화가로서 유명해진 계기는 사후에 발간된 한 편의 소설 덕분이다.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이 고갱의 삶에 모티프를 얻어 소설 <달과 6펜스>를 발표하면서 소설의 명성과 함께 고갱의 작품도 재조명된다. 1891년 마흔이 넘는 나이에 고갱은 부인과 5명의 아이를 파리에 버려둔 채 예술적 영감을 좇아 타히티에 당도한다. 파페에테를 벗어나 태곳적 원시림이 숨 쉬는 마타이에아 섬에 거처를 마련하고 14세의 어린 소녀 테하마나를 뮤즈로 작품 활동에 몰두한다. “전원에 널려 있는 눈부신 모든 것이 나를 눈멀게 만들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는 때 묻지 않은 원시의 자연과 순수한 폴리네시아인을 원색의 대담한 색채로 화폭에 옮겼다. ‘타히티의 여인들’, ‘망고 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 ‘테하마나의 조상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등 13년에 걸쳐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타히티는 그에게 완벽한 유토피아가 되어주지 못했다. 고갱은 보헤미안처럼 떠돌았고, 그때마다 뮤즈가 되어준 여인들로부터 도망쳤으며 극심한 생활고와 고독에 몸부림쳤다. 불현듯 파리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티아레 꽃향기에 이끌리듯 다시금 타히티로 돌아왔다. 예술가로서의 분투와 인간으로서의 고독한 삶을 감내한 고갱은 결국 1903년 마르키즈제도의 한 섬에서 눈을 감았다. 자신의 그림과 음식을 바꿔 먹어야 할 만큼 궁핍한 예술가이자 낯선 이방인이었던 탓이었을까. 타히티에는 위대한 화가를 기억해줄 만한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가 3년간 파페에테에 머무르며 아틀리에로 삼았던 오두막만이 모조품으로나마 고갱의 삶과 흔적을 기억할 뿐이다.

블루의 정의, 앙리 마티스

야수파를 대표하는 수장이자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 앙리 마티스는 블루 컬러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심지어 그가 즐겨 사용한 파란색을 두고 ‘마티스 블루’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조차 매너리즘은 피할 길이 없었다. 1930년 예순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타히티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기왕이면 존경하는 고갱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타히티행을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3개월 남짓 타히티에 머물며 마티스는 고요한 새벽 거리를 걷고, 파랗게 그러데이션을 이룬 바다에서 수영하며 시간을 보낸다. 복잡한 나무 잎사귀를 관찰하고 강렬한 남국의 태양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폴리네시아인의 삶을 들여다봤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마티스에게 타히티의 잔상은 오랜 세월 동안 빛바래기는커녕 오히려 작품의 영감으로 다시 소환된다. 1941년 일흔이 넘는 고령의 나이로 수술을 받은 뒤 휠체어에 의지하면서 그는 붓 대신 가위를 든다. 종이에 불투명 수채화 물감(구아슈, Gouache)을 칠해 색종이를 만든 후 가위로 종이를 오려 붙이는 일종의 콜라주 기법을 사용한 ‘컷아웃(Cut-outs)’ 작업에 몰두했다. 그가 컷아웃 작품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태피스트리(여러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를 위한 도안을 의뢰받으면서부터다. 타히티 여행에서 마주했던 풍경이 영감이 돼 ‘폴리네시아, 하늘’, ‘폴리네시아, 바다’ 연작을 완성한다. 톤이 다른 파란색 종이를 교차되도록 붙이고 그 위에 흰 종이로 새와 해조류의 형상을 오려 붙인 작품이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캔버스 삼아 타히티의 바다와 하늘 풍경을 오려 붙였다. 황금빛 햇살이 들이치는 타히티의 품안에서 그렇게 앙리 마티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술혼을 불살랐다.

천국 그 이상의 섬, 보라보라

타히티 여행객 중 열에 아홉은 2~3곳의 섬을 옮겨 다니며 순수한 자연을 만끽한다. 국제공항이 자리한 타히티에서는 여행 첫날과 마지막 날을 머물 뿐 대부분 무레아, 후아히네, 타하, 라이아테아 등 인근 섬으로 향한다. 그중에서 전 세계인의 버킷리스트에 오를 만큼 아름다운 섬이 바로 이름마저 예쁜 보라보라다. 타히티에서 경비행기로 1시간 남짓 떨어진 곳으로, 호화로운 라군 위에 자리 잡은 고급스러운 방갈로에서 프라이빗한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장소다. 산호로 둘러싸인 환초지대에 위치해 있어 눈을 돌리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푸른빛 라군이 펼쳐진다. 그 어떤 물감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투명하고 영롱한 하늘빛 바다가 두 눈을 멀게 한다. ‘태평양의 진주’라는 수식어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대변해주진 못한다. 호수처럼 잔잔한 라군을 따라 최고급 방갈로 리조트가 진주처럼 박혀 있다. 보라보라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여행객들은 리조트에서 보내온 보트를 타고 자신들만의 꿈의 안식처로 향한다. 사실 그 어떤 액티비티보다 보라보라에서는 방갈로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때때로 바다로 뛰어드는 즐거움이 제일이다. 그러다 하루쯤 스쿠터를 대여해 해안일주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돌거나 가오리와 수영하며 스노클링을 즐기는 라군 투어를 떠나도 좋다. 라군 투어는 보트를 타고 가오리가 자주 출몰하는 지점으로 이동 후 함께 수영하는 이색 체험으로, 리조트 라군과는 또 다른 투명하고 말간 바다를 유영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미술관에서 그 어떤 명작을 대면하는 순간보다 타히티의 햇살과 바다, 바람, 꽃이 가져다주는 환희가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자연이 건넨 원초적인 행복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어서다. 고갱과 마티스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들이 타히티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것도 자연을 향한 인간의 순수한 기쁨과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