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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

NOV-DEC 2020

다시 태어난 도시, 르 아브르

전쟁으로 인해 건물은 파괴되고 평범한 일상마저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잿빛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헌신과 도전이었다. 대담하고 실험적인 건축물이 보금자리로 들어선 르 아브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던 시티로 새롭게 태어났다.

Writer 이은혜(칼럼니스트) Editor 주원
Cooperation 프랑스관광청(kr.france.fr)

져니 copy

한때는 ‘축복받은 항구’로 불리던 곳.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선원들과 대구 잡이 어선,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수십만 자루의 면화와 커피 원두로 항구는 북적였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에 들고 나는 선박 대부분이 르 아브르(Le Havre)를 거쳐갈 만큼 도시는 번성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물건은 이곳에서 다시 센강을 따라 파리로 흘러갔다. 잔잔한 강물같이 순조롭게 흐르던 도시의 일상은 전쟁으로 한순간 깊은 절망 속으로 침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르 아브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해외 진출에 유리한 항구도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르 아브르를 차지하기 위해 독일군과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대규모 공습과 폭격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됐다. 16만 명의 시민 중 5,000명이 사망하고, 8만 명이 집을 잃었다. 옛 영화를 잃어버린 잿빛 도시에 희망의 불씨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부서진 벽돌을 치우고 그 자리에 단단한 새 보금자리를 지었다. 1945년부터 1964년까지, 20년에 걸쳐 르 아브르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70세의 노장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의 지휘 아래 전 세계 100명 이상의 건축가가 도시의 밑그림을 새롭게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현대건축의 영감

르 아브르를 다시 재건할 적임자는 오귀스트 페레뿐이었다. 도시엔 이재민이 넘쳐났고, 빠른 재건만이 답인 상황에서 콘크리트 건축의 귀재 오귀스트 페레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를 도와 전 세계에서 모여든 100명 이상의 건축가들은 철저한 계획도시를 구상했다. 격자형 도로를 깔고 반듯하게 구획을 나눈 시가지에 규칙적으로 건물을 배치했다. 덕분에 시청사 전망대에 오르면 질서정연한 도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당장 이재민이 살 집이 급했다. 주택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많이 지어야 했다. 불필요한 장식적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절제된 디자인의 건물을 설계했다. 오귀스트 페레는 여러 세대가 한 건물에 살며, 집집마다 개별 부엌과 거실, 침실과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고안했다. 시청사 인근에는 당시 최초로 지어진 노란 맨션 4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아파트가 실용적이고 독립적인 거주 공간이지만 당시로서는 혁신 그 자체였다. 집에 맞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도 제시했다. 1950년대 실제 아파트 내부를 재현한 ‘페레 아파트 전시관(Appartement Témoin Perret)’에는 수납을 극대화한 실용적인 가구와 싱크대, 욕조시설 등 공간과 가구가 딱딱 들어맞게 배치돼 있다. 형태와 기능이 완벽히 조화를 이룬 인테리어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모던하다. 단순히 공장에서 찍어낸 듯 획일적인 건물로 도시가 재건됐다면 르 아브르는 20세기 유럽 도시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귀스트 페레와 건축가들은 실용적이되 아름다운 도시 미관을 위해 현대적이고 대담한 건축을 선보였다. 르 아브르 시민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광장 앞 시청사와 생 조제프 교회(St.Joseph’s Church)는 도시의 상징이자 오귀스트 페레의 도전 정신과 세계관을 요약한다. 특히 도심 한복판에 우직하게 서 있는 107m 높이의 생 조제프 교회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언뜻 외관만 봐서는 교회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전형적인 교회 건축양식을 탈피한 모양새다. 전쟁으로 고통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와 편안히 위로받길 바라는 뜻에서 종교적인 장치를 최대한 배제한 까닭이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서면 중세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생 조제프 교회의 진면모가 베일을 벗는다. 1만2,768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일제히 쏟아내는 성스러운 빛 방울이 묵직한 콘크리트 기둥 위에 맺혀 일렁인다. 햇살 좋은 날엔 그 빛이 더욱 찬연하다. 잿더미 위에 다시 뼈대를 세우고 벽을 쌓아 건물을 짓듯, 사람들의 일상도 절망을 딛고 기적처럼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건축가의 염원이 전해져 뭉클하다.

끝나지 않은 도전 정신

현대건축의 선구자들이 20년간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르 아브르는 실험적인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브라질 현대건축의 아버지’ 오스카 니마이어와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장 누벨은 각각 자신들의 걸출한 작품을 르 아브르에 남겼다.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설계하고 디자인한 인물이다. 그가 1960년대 선보인 초현대적 건축물은 여전히 브라질리아를 대표하는 건축으로, 혹자는 그를 두고 ‘콘크리트의 피카소’라는 애칭을 붙이기도 했다. “건축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삶과 친구와 가족이다”라는 그의 지론은 건축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82년 완공된 르 볼칸(Le Volcan)은 원래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2010년 5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과 문화센터로 거듭났다. 하나로 연결된 두 개의 건물은 거대한 화산을 연상시킨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진 순백의 건물은 외부와 내부가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하나로 통일된다. 원색의 오렌지 컬러가 공간에 생기를 더하고, 유리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아트리움은 시선을 압도한다. 각양각색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원하는 강좌를 듣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간을 탐험하는 모험가의 설렘이 엿보인다. 파리의 아랍문화원과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을 설계한 장 누벨은 2008년 수상 복합단지 레 뱅 데 독(Les Bains des Docks)을 도시 외곽 알바트르 해안에 건설했다. 로마의 온천을 모티프로 한 레 뱅 데 독은 상상 속에나 등장할 법한 독특한 미감을 자랑한다. 장 누벨은 실내 공간에서도 자연광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했다. 건물을 지배하는 화이트 컬러는 파란 수영장 물과 어우러져 시원한 청량감을 안긴다. 실내 수영장과 온천, 사우나, 터키식 목욕탕과 피트니스센터 등 5,000㎡ 공간에 자리한 시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곳은 야외 수영장이다. 빛과 그림자, 하늘과 물, 건축이 한데 어우러져 어느 미래 도시의 수영장을 그리고 있다. 반듯하게 재단된 건물은 퍼즐 블록을 끼워 맞춘 듯 입체적이다. 특히 시시각각 해의 움직임에 따라 빛과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고, 그럴 때마다 공간은 새로운 공간으로 창조된다. 흰색 벽에 반사된 햇빛은 더욱 환하게 주변을 비추고, 파란 물 위로 산란하는 빛의 파편들은 황홀함을 자아낸다. 수영장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아도, 그저 눈앞에 보이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랑한 도시

현대적인 건축 도시로 거듭난 오늘날의 르 아브르가 아닌 전쟁으로 파괴되기 전 모습은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MuMa)의 역사적인 작품 속에 남아 있다. 프랑스 유명 작가이자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르 아브르에 현대미술관 건립을 추진했고, 도시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1961년 개관했다. 이곳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못지않은 방대한 인상파 컬렉션을 자랑하는데, 르 아브르가 속한 노르망디 지역이 바로 ‘인상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르 아브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화가 가운데 클로드 모네가 있다. 그는 유년 시절을 이곳의 하늘과 바다, 센강을 보며 자랐다. 르 아브르는 예나 지금이나 늘 바람이 많이 분다. 구름은 시시때때로 모양을 바꾸고, 하늘은 해가 났다 금방 구름이 끼며 변한다. 풍경을 투영하는 바다와 강물도 제빛깔을 바꾸기 일쑤였다. 천변만화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아마 화가들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다 풍경에서 받은 즉흥적인 인상을 빠르게 표현하는 인상주의 화풍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인상주의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모네의 명작 ‘인상, 해돋이’는 1872년 그가 고향 집에서 내려다본 서정적인 항구 풍경을 보고 즉흥적인 인상을 담은 작품이다. 모네의 스승이던 외젠 부댕 또한 르 아브르에서 기량과 재능을 꽃피웠고, 세잔과 고갱이 스승이라 부르며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카미유 피사로는 숨을 거두기 얼마 전까지 르 아브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묵으며 창밖 풍경을 그렸다. 르 아브르 부둣가에 자리한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은 빛에 주목한 인상파 화가들을 위한 미술관답게 사방이 빛에 에워싸여 있다. 널찍널찍한 2층 규모의 건물 내부에는 모네의 대표작을 비롯한 300여 개의 습작뿐만 아니라 외젠 부댕,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 피에르 보나르 등 주요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으로 가득하다. 창밖으로 설핏설핏 보이는 푸른 바다가 화가들의 작품 위로 하나씩 오버랩되며, 자연을 관조하며 영감을 떠올렸을 인상파 화가들의 고뇌가 그림 한 점 한 점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