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E THEME

JOURNEY

부엔 카미노, 산티아고 순례길

인생에 한 번쯤 꿈꾸는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Editor 조정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마음을 비우기 위해, 나를 찾고 싶어서, 어쩌면 인생을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사람들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걷는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목적지는 하나다. 스페인의 수호성인 성 야고보 무덤이 있는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9세기 이곳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성지순례를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지금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가 만들어졌다. 스페인에만도 루트가 여럿이고 포르투갈에서 오는 방법도 있지만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길은 프랑스 남부의 국경 마을 생 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Camino Frances)이다. 거리 약 800km, 평균 40일의 낮과 밤을 길 위에서 보내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다다를 수 있다. 걷기 좋은 계절은 4~5월과 9~10월이지만, 여름이 성수기인 까닭은 성 야고보의 축일(순교한 날)이 7월 25일이기 때문이다.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성년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를 모두 속죄받고 다른 해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받는다는, 오래전 내려진 교황의 칙령에 따라 많은 사람이 이날을 목표로 순례에 나선다. 그러므로 오히려 가을 이맘때쯤 순례길에 오르면 좋은 날씨는 물론 숙소도 식당도 그리 붐비지 않아 호젓하게 지내기 좋다.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자 여권 크레덴시알(Credencial)을 발급받으면 진짜 출발이다. 이제 순례자 전용 숙소 알베르게(Albergue)에서 잠도 잘 수 있고, 식당에서 순례자 전용 메뉴도 주문할 수 있다.

나의 걸음을 찾는 일

순례길 첫날부터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 목적지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에 높이 솟아 있는 해발 1,410m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애초에 출발을 론세스바예스에서 하는 방법도 있지만, 순례길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피레네 산맥에 있다는 앞서 걸은 이들의 이야기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험난한 시작에 대한 다소 불만스러운 마음은 피레네 산맥의 탁 트인 풍광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 떼 모습에 깨끗이 씻어진다. 가리비 껍데기 모양이 새겨진 어른 키만 한 국경선 표지석을 지나면 프랑스에서 스페인 땅으로 들어선 것이다. 순례길에서는 가리비 껍데기와 노란색 화살표가 지도를 대신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례길의 상징이 가리비 껍데기가 된 데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순교한 성 야고보의 시신을 제자들이 유언에 따라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는데, 한참을 떠내려가 스페인 이베리아 해안에 닿은 배를 보니 가리비 껍데기들이 성 야고보의 시신을 에워싸 보호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작가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팜플로나를 지나 용서의 언덕을 넘어 매일 무료로 와인과 물을 나눠주는 이라체의 샘에 들러 갈증을 달랜다. 스페인 최고의 와인 산지인 라 리오하의 드넓은 포도밭 사이를 걷고 걸어 중심 도시 로그로뇨에 머물고, 다시 작은 마을들을 걸어 옛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부르고스에 도착하면 어느새 순례자가 되어 길을 걸은 지도 보름에 가깝다. 일과는 날이 갈수록 단순해진다. 새벽 일찍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하루치의 길을 걷는다. 체력이 남았다면 조금 더 걷고 피로가 쌓였다면 조금 덜 걷는다. 오후에는 오늘 밤 머무를 알베르게를 찾아 짐을 풀고 빨래 등 자잘한 일들을 처리한다. 남은 시간에는 구경 삼아 마을도 산책하고 책을 읽거나 침대에 누워 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걸음을 찾는 일이다. “호흡은 가쁘기 전에 조절하고 근육은 지치기 전에 풀어주어야 한다”는 휴식의 원칙을 기억하며, 이제 그만 쉬어야 할 때와 조금 더 힘을 내야 할 때를 분별하고 내 몸과 마음에 편안한 걸음을 찾아야 남은 여정이 괴롭지 않다. 같은 800km의 길을 누군가는 30일 만에 걷고, 또 누군가는 평균 40일을 훌쩍 넘겨 50일 가까이 걷는다. 각각의 인생처럼 걸음 역시 다르므로 정답은 없다.

순례길에서 만난 오늘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11세기에 완성돼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15세기까지 가장 번성했다. 성당, 다리, 수도원, 광장 등 마을마다 중세 시대 건축물을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중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지어진 부르고스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3번째로 꼽힐 만큼 규모가 크다. 첨탑은 금방이라도 하늘을 찌를 듯 뾰족이 치솟고, 벽을 장식하는 조각들은 살아 움직일 듯 섬세하다. 부르고스 대성당이 있는 마을에서 잘 먹고 잘 쉬어야 다음으로 이어지는 메세타 평원을 걸을 수 있다. ‘카미노의 사막’, ‘고독의 길’ 등으로 불리는 메세타 평원은 평균 고도 610~760m의 고원 지대다. 평원은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약 200km 가까이 계속돼 최소 5일에서 일주일은 걸어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탄한 땅이 뭐 그리 힘들까 싶지만, 의외의 적은 지루함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밀밭은 가도 가도 마치 제자리걸음인 듯 혼을 쏙 빼놓는다. 그늘을 찾기도 쉽지 않아 여름에 찾아온 순례자 중 많은 이가 메세타 평원을 걷다가 순례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아예 버스를 타고 메세타 평원을 건너뛴다. 하지만 고생스러운 여행이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 되듯 걷고 나면 그 어느 길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길고 긴 메세타 평원이 끝나고 프랑스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철 십자가에 오르면 순례길도 후반부로 들어선다. 멀게만 느껴졌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중심 도시로 향하는 갈라시아 지방이 지척이다. 하루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조급함과 적응할 만하니 끝난다는 아쉬움에 마음이 어지럽다. 이럴 때는 지금까지 순례길에서 배운 대로 오늘 이 순간에 집중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풀포를 저녁 식사로 선택했다. 풀네임은 풀포 아 라 가예가(Pulpo a la gallega)로 ‘갈라시아식 문어 요리’라는 뜻이다. 삶은 문어와 감자에 올리브 오일, 파프리카 가루, 소금, 식초 등을 뿌려냈을 뿐인데 기막힌 맛이 난다. 문어의 쫄깃한 식감은 물론 소스에 빵을 찍어 먹어도 좋고 맥주 안주로도 근사하다. 성배와 성체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오 세브레이로의 산타마리아 성당에도 잊지 않고 들른다. 중세의 어느 날, 폭설을 뚫고 발렌시아 마을에서 온 농부가 있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걸어온 농부를 이상히 여겼는데, 축성을 하자 포도주와 빵이 각각 피와 살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산타마리아 성당 정면에 전시된 그릇은 기적이 일어난 당시 사용한 것으로, 왼쪽에는 살이, 오른쪽에는 피가 담겨 있다고 한다. 눈으로 보고도 어쩐지 믿기 힘든 이야기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사리아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 최후의 출발지다. 순례길 인증서를 받기 위해서는 10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그 지점이 되는 마을이 이곳이다. 사리아를 지나 조금만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 남았다는 표지석이 보인다.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로 줄어들자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처럼 무리는 금물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모습 그대로 걷고 먹고 자고, 다시 걷는다. 중세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들어가기 전 몸을 씻었다는 라바코야 마을의 냇가를 지나 ‘기쁨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몬테 데 고조를 향해 오른다. 정상에 서면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첨탑이 시야에 담긴다.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몬테 데 고조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한 번 더 머물고 아침 일찍부터 걸어 정오 미사에 맞춰 도착하거나, 전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자고 다음 날 아침 휴식을 취한 뒤 미사에 참석한다.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대성당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곳곳에서는 환호성이 터지고, 완주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이들로 붐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순례자 대부분은 매일 정오에 시작되는 미사를 드리며 그간의 순례를 기념한다. 특히 매주 일요일과 성탄절 등 특별한 날, 혹은 특별 헌금이 있는 경우 치러지는 향로 미사는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40일 동안 알베르게, 바, 식당 등에서 열심히 모아온 도장 세요(Sello)를 보여주고 콤포스텔라 인증서까지 받으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여정에도 마침표가 찍힌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순례자들은 ‘부엔 카미노(Buen Camino)’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좋은 여행이 되길, 너의 길에 행운이 있길’이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순례자에서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지금, 다시 걷는 인생길에도 부디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