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우리 안의 맛

한식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 생각과 지식 들여다보기.

맛의 역사를 지키며,
한식연구가 서명환

“봄에는 순을 먹고 가을에는 뿌리채소를 먹습니다. 순에는 독이 있어 데치고 말려 먹지요. 뿌리채소는 여름을 나며 메마른 몸에 수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자연의 순리와 선조의 통찰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명환의 진지하고 엄숙한 대화를 듣는 와중에, 무례하게도 피부에 눈이 더 갔다. 말갛고 깨끗해, 중년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삼시 세끼 먹는 것이 몸으로 드러난다면, 그가 먹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일 테다. 여름의 열기로 자란 과일과 겨울의 냉기를 견딘 해산물, 사계절을 몇 번이고 난 장 같은 것이다.
“한식을 정의하면 ‘기다림’입니다. 우리 음식이 완성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과 절차가 있어야 해요. 가장 중요한 장이 익기까지 적어도 사계절을 나야 하지요. 서둘러 키운 채소나 빠르게 맛을 내는 인공감미료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여깁니다.”
그는 한식의 정의에 ‘그리움’을 더한다. 나이 들수록 회귀하는 입맛, 그 그리움은 오롯이 한국 음식으로 향한다. 그 역시 늦여름 이맘때 어머니가 차려준 호박잎쌈과 강된장을 생생히 기억한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했듯 그의 어머니도 해마다 간장과 된장, 고추장을 빚고 젓갈을 담가 두고두고 썼다. 집집마다 술이며 초를 담갔던 시절, 가을 녘이면 감과 사과 등 햇과일로 식초를 담근 뒤 단지 입구에는 꼭 솔가지를 꽂아두었다. 솔잎이 노랗게 변하면 식초가 익은 것이라 어른들은 말했다. 수십 년, 수백 년 전 가을에도 즐겼을 풍류를 설명하며 그는 눈을 반짝인다.
이날 그가 차린 다과는 금은보화에 버금가도록 곱다. 진달래경단을 띄운 잣국과 송화다식, 삼색단자… 할결같이 첫맛은 심심하되, 씹을수록 입안에 풍미가 가득 찬다. 서명환은 이를 두고 “혀끝으로 쌓이는 맛”이라고 설명한다. 거듭해서 음미할수록 진해지는 맛과 향이다. 그 풍요하고 귀한 유산을 서명환이 지키고 있다. 우리 땅에, 우리 몸에 기록된 맛의 역사다.

한식의 깊이와 파인다이닝의 독창성으로,
장진모 셰프

“입을 크게 벌리더라도, 꼭 한입에 넣어야 합니다.”
셰프의 안내에 따라 동백꽃 크기의 호박나물을 입속에 크게 밀어 넣었다. 달큰한 애호박과 구수한 게살, 톡톡 터지는 캐비아의 식감이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춘다. 30년은 족히 먹어온 애호박나물이기에 익숙하면서도, 예쁜 모양과 깊은 향이 무척 신선하다. 근사하게 지은 고향집 같다고 할까.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묘미를 통해 ‘여긴 한국이고, 지금은 현대다’라는 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애호박과 전복, 돼지삼겹살처럼 흔한 재료를 쓰되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있지요. 식자재는 캐비아를 제외하고 전국 각지에서 공수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나는 가장 건강한 식자재라 자신합니다.”
한식과 파인다이닝은 구조와 구성부터 제법 다르다. 일반적인 한식은 밥, 국, 찬을 넓은 상 위에 펼쳐 내지만, 파인다이닝은 대부분 시간 순으로 좁은 자리에 올려 낸다. 장진모는 익숙한 우리 음식을 인수분해하고 파인다이닝의 틀로 재조합해 선보인다. 이 과정이 테트리스처럼 꼭 들어맞는 것만은 아니다. 장진모는 한식에서 특징적인 요소를 덜고 새로운 방식을 채우며, 사이사이의 공백은 플레이팅과 퍼포먼스로 메운다.
“하루 반나절은 메뉴를 구상하며 보냅니다. 한식 고서를 연구하는 한편 세계 각국의 요리를 두루 살피고 있어요. 김치와 젓갈을 얼마나 활용할지, 어육김치와 승기악탕처럼 역사가 깊은 음식에 어떻게 접근할지 등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묘미의 메뉴는 시즌마다 바뀐다. 늦여름 이맘때 그는 한창 가을 메뉴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애정이 깊은 호박나물은 보전하고, 전후 요리를 조금씩 바꿔 여름과는 또 다른 구성을 계획한다. 그중에서도 야심차게 소개하는 메뉴는 바로 대하소금구이다. 가을엔 꼭 대하를 먹어야 한다며 특유의 열정 가득한 목소리로 소개하는데, 그 내용이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아는 대하소금구이지만, 누구도 몰랐던 요리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불과 팬, 소금 없이도 대하소금구이가 완성되는 마술을 눈앞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입으로 기억하고 손으로 기록하다,
푸드 라이터 이해림

‘이해림’ 석 자는 저서 <탐식생활> 발간 전에도 흔히 발견되던 이름이다. 잡지와 신문에서 국수 먹듯 후루룩 읽었던, 그러나 진한 사골 육수처럼 내용이 충실했던 음식 칼럼의 창조자다. 그 스스로는 ‘푸드 라이터’라 부른다. 음식과 음료 관련 콘텐츠를 기고하며 영상 및 이벤트, 서비스, 상품 기획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할머니가 담근 장과 김치, 말린 나물을 먹을 수 있는 1980년대생인 제게 그 맛은 미식으로 추억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전통의 맛은 공산품으로 대체되고 있고, 가정마다 분포했던 다양성도 사라지고 있지요. 더군다나 제 이후 세대에서는 샌드위치와 샐러드, 쌀국수, 마라탕 등 다양한 식문화가 수입되고 품질이 높아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어요. 사람이란 모르는 맛은 잘 먹지 않기에, 90년대 이후 탄생한 세대가 한국 고유의 맛을 알고 유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어쩌면 취재를 하고 책을 만들고 상품을 만들고 영상을 제작하는 모든 일이, 제가 맛있는 것을 계속 먹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어요.”
맛을 탐닉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각별히 여기는 것이 있다. 잣과 야생 버섯처럼 굳이 찾아 나서야 구할 수 있는 식자재, 포도와 사과, 배 등 철 지나면 사라지거나 맛이 확연히 떨어지는 과일, 꽃게나 전어 등 제철에 잡힌 바다 생물이다. 미식가의 본능적 기질로 제철의 맛을 좇는 셈.
입으로 향유한 맛은 숙성을 거쳐 글이 된다. “새빨간 사과가 무르익으면, 여름은 저절로 멈춘다”, “바다 속에 우물이 있다면 거기서 퍼낸 물이 딱 이 맛(새조개)일 것이다.” <탐식생활>에 담긴 지식으로 평가하자면 현대판 <자산어보>쯤 되겠다. 책이 전하는 교훈은 아주 분명하다. 음식은 알수록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책의 부제 역시 ‘알수록 더 맛있는 맛의 지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