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나를 정의하는 단어들

정여울과 성립, 현미경 들여다보듯 현재를 살피는 두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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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심리학×여행,
정여울

문학×심리학×여행, 정여울 희망이자 구원,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에세이스트이자 문학평론가 정여울이 문학과 심리학, 여행을 가리키며 꺼낸 단어다. 이 세 가지는 20여 년 ‘글밥’ 벌어온 이가 정갈하게 유지한 관심사다. “내가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기울인 게 결국 내가 되는 것이지요.” 그 말마따나, 응축된 관심사는 곧 정여울을 완성하는 단어인 셈이다. 관심사와 취향, 직업이 통일된 삶은 단편적인 쾌락과는 거리가 제법 멀다. 가령 문학을 예로 들면, 읽기를 좋아하지만 늘 즐겁지만은 않다. 곱씹듯 읽기 위해 뇌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건 몸을 쓰는 일만큼이나 피로를 동반한다. <헤세로 가는 길>과 <빈센트 나의 빈센트> 등 인기를 끈 작품 못지않게 좋은 책을 써야 한다는 압박과, 전작 주제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부담도 크다. 그럼에도 모든 걸 감내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정여울은 말한다.
“문학, 심리학, 여행 이 세 가지는 아무리 시간을 쏟아도 아깝지 않고, 아무리 돈을 써도 후회하지 않는, 오히려 더 써야겠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분야지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내 모든 것, 저는 이걸 ‘블리스(Bliss)’라고 표현합니다.”
블리스를 직역하면 환희와 축복, 인생에서 캐낼 수 있는 가장 밝은 보석이다. 진정한 희열을 주는 것, 아무런 억압도 없이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완전한 기쁨을 주는 존재를 가리킨다. 다만 원석을 가공해 보석으로 만들듯, 결과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갈고닦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책에 몰입할 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글을 쓰며 집중할 땐 밤잠을 잊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지를 끊임없이 검열한다. “재능이 곧 결과가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을 끝없이 소진해본 이가 낼 수 있는 가장 단호한 목소리로 정여울은 말한다.

정여울의 추천 서적

김소연의 <마음사전>
말의 뉘앙스를 탐구하는 책이자, 마음이 느끼는 모든 감정에 대한 사전. ‘중요하다 vs 소중하다’ ‘행복 vs 기쁨’ 등의 예시를 통해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탐구한다. 우리의 감정이 얼마나 무디고 부정확한 언어로 표현되었는지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존 맥스웰 쿠체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한국인이 저자라 해도 믿을 정도다. 번역가 왕은철의 명징한 단어 선택이 압권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통찰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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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연필×공감,
작가 성립

“생각보다 세상은 무심하고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작가 성립의 전시에서 발견한 문구다. 그의 말처럼 세상의 인정에는 한계가 있다. 뜨거운 찬사라도 어느새 휘발되고, 관계 역시 언제든 이어졌다 흩어질 수 있다. 외부의 인정 이전에 스스로를 충족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 이야기에 가장 관심이 깊은 건 결국 나 자신이다. 작가 성립의 작품에 얽힌 나름의 신념이다.
주재료는 연필, 모델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다. ‘작품’은 하루에 500장 이상 탄생할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10장 미만으로 발굴되기도 한다. 여름철 칡넝쿨 같은 사색의 줄기는 연필 세 자루를 하루 만에 몽당연필로 만들 정도다. 성립의 작품은 여백이 많다. 선과 선 사이, 먹과 배경 사이 공백이 있다. 거친 명암 위에 내 표정을 빗대기도 하고 주변 사람을 투사하기도 한다. 작품은 하나라도, 보는 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다른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키 큰 이와 작은 이가 손잡고 걷는 모습에서 내 부모를 연상하거나 자녀를 떠올릴 수 있고,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촉촉한 감정이나 공허한 마음을 읽을 수도 있다.
“선과 선 사이 틈새를 남기며 거칠게 그리는 화법은 관객을 염두에 둔 작업 방식이에요. 작품 속 인물은 성적 정체성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양성성을 지향합니다. 성별에 관계없이, 관객이 각자의 이야기를 투영하게끔 유도하는 거죠.”
프랑스 심리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이 길 위에서 방황할 때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여행하는 인간’, 즉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의 면모는 성립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6개월간 월 100만원을 벌어보고, 가능하면 지속하자’는 다짐으로 전업 작가의 하루를 시작했다. 6개월간 목표 달성 후 조금씩 목표와 시간을 늘려가며 5년여를 보냈다. 그사이 의류부터 스포츠까지 수많은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하고, <생각하는 오른손>과 <틈> 등을 펴냈으며 샤이니와 딘 등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사색으로 쌓은 제법 근사한 결과다.
“작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걸 행운으로 여깁니다. 2020년 역시 기대하고 있어요. 신작을 마련해 전시회를 열 계획이고, 여행사와 컬래버레이션한 프로젝트도 진행 예정입니다. 여전히 목표를 짧게 두고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긴 해요. 일단은, 2020년 6월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본명 성동섭 대신 내세우는 성립은, ‘일이나 관계 따위가 제대로 이루어짐’이라는 사전적 뜻을 그대로 따른다.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는가, 가끔 자문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멈추지는 않는다. 제대로 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걷는다. 생각하고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또 고민하는 지극히 건강한 삶의 루틴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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