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ECIAL

OVERSEAS

NOV-DEC 2020

예술가의 집

삶의 안식처에서 영감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들.

Writer 이은혜(칼럼니스트) Editor 주원

피카소의 아틀리에, 그리말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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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햇살과 코발트빛 바다를 품은 도시, 앙티브. 수려한 자연 경관만큼이나 예술적 영감의 발원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을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는 20세기 입체파를 이끈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있습니다. 그가 앙티브에서 보낸 환희의 순간들은 걸출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앙티브의 밤낚시’는 1939년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완성한 걸작입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46년, 피카소는 다시 앙티브를 찾았습니다. 눈부신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고성이 그의 임시 거처였습니다. 12세기 요새로 지어진 그리말디 성은 당시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장소였는데요. 그럼에도 박물관 관장은 성의 가장 높고 넓은 층을 피카소의 작업실로 적극 추천했습니다. 피카소도 흔쾌히 아틀리에 제안을 수락했고, 3개월 동안 그리말디 성에 머물며 마음껏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죠.
지중해를 닮은 따스한 느낌의 작품과 편안해 보이는 사진 속 그의 표정으로 짐작컨대, 피카소는 이곳에서 퍽 행복한 시간을 보낸 듯싶습니다. 그는 앙티브에 머물면서 풍경화부터 드로잉, 판화, 조각, 도예품까지 245점의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앙티브 시에 기부됐고, 그가 여든다섯이 되던 해인 1966년 그리말디 성은 피카소 미술관으로 재개관하게 됩니다. 사실 피카소의 자취가 남겨진 도시라면 어김없이 그를 기리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스페인 말라가를 비롯해 바르셀로나, 파리, 발로리스에도 피카소 미술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은 생전 그의 작업 공간이 전시 공간으로 거듭난 곳이어서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예술혼을 불살랐을 대가의 숨결이, 오늘날까지 미술관 곳곳에 배어 있는 듯합니다.

가우디가 재창조한 카사 바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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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바르셀로나는 경제 부흥에 따른 도시계획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상권이 형성된 그라시아 거리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호들의 저택이 경쟁하듯 들어섰죠. 섬유업계의 거부, 조셉 바트요는 안토니 가우디에게 한 건물의 재건축을 의뢰합니다. 가우디는 재건축 대신 기존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모험을 택했고, 1906년 약 2년여 간의 공사 끝에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집대성한 카사 바트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건축 당시에도 카사 바트요는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32m 높이의 건물 외벽은 색색의 세라믹 타일과 유리로 뒤덮여 오묘한 빛을 내고, 물결치듯 역동적인 모양의 지붕은 용의 비늘을 본뜬 것처럼 매끈합니다. 뼈를 형상화한 외부 기둥과 해골을 연상시키는 발코니 난간은 상상 속 마법사의 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카사 바트요 내부로 들어서면 또 다른 차원의 경이로운 디자인이 펼쳐집니다. 마치 거대한 동물의 몸속을 탐험하는 기분이 들게 하죠. 곡선 모양의 둥근 천장과 동물의 척추를 형상화한 계단 난간, 거대한 오크 문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빛의 파티오까지 모든 것이 환상적입니다. 심미성뿐만 아니라 문손잡이 하나까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해 기능성을 고려한 흔적도 보입니다. 특히 건물 한가운데 위치한 파티오는 건물 곳곳에 빛과 공기를 분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통로이자 카사 바트요의 핵심입니다. 가우디는 모든 방에 자연광이 골고루 들도록 위쪽에는 진한 색조의 파란 타일과 작은 창을 내고, 아래쪽은 더 많은 햇빛이 들도록 밝은 색조의 타일과 큰 창을 배치했습니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카사 바트요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남겼습니다.
“안토니 가우디는 고요한 날의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카사 바트요 건물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이 건물은 물이 뻗어나가는 모양, 물이 잔잔한 모양, 반짝이는 물의 모습과 바람에 의한 물줄기의 모양 등 다양한 물의 형태를 나타내는 진정한 조각이다.”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건축으로 보는 이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가우디의 철학이 카사 바트요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꽃과 나무가 반기는 모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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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회화의 거장 클로드 모네만큼 자연을 사랑한 예술가가 또 있을까요? 그는 생의 절반을 노르망디에 위치한 지베르니에서 보냈습니다. 1883년 가난한 화가였던 모네는 가족을 이끌고 파리 외곽의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됩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그는 2층짜리 농가 주택을 장만해 무려 43년동안이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예술혼을 펼쳤습니다.

오늘날 박물관으로 복원된 모네의 집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모네는 수입이 생길 때마다 가구를 들이고 인테리어를 손보며 집 꾸미기에 열심이었는데요. 벽에 붙은 타일이며 걸려 있는 식기 하나하나에서 그의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복제품이기는 하지만 모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 1층 아틀리에에서는 창밖으로 꽃이 만발한 정원이 한눈에 담겨 황홀한 시간을 선물합니다. 산뜻한 노란색 벽이 인상적인 식당에는 그가 수집한 일본 판화 컬렉션이 놓여 있고, 소박하고 아늑한 모네의 방은 사방에 뚫린 커다란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평생에 걸쳐 화폭에 빛을 그려온 모네다운 인테리어죠. 아마도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밖 정원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었을 것입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두 가지는 그림 그리는 일과 정원 가꾸는 일이다”라고 했을 만큼 모네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에게 땅은 캔버스요, 꽃과 식물은 수채화 물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봄이 되면 집 앞 정원에는 붓꽃, 작약, 수선화, 장미와 같은 총천연색 꽃들이 만발하며 아찔한 꽃내음을 풍깁니다. 집 앞 정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모네 필생의 역작, 물의 정원이 자리합니다. 말년의 모네는 자연이 뿜어내는 다양한 색과 빛을 화폭에 담기 위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모네의 대표작 ‘수련’ 연작이 바로 이 연못에서 탄생했죠. 한껏 늘어진 버드나무와 야생화, 곧게 뻗은 대나무, 그리고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수련은 동양적인 정취를 자아내며 감동을 안깁니다.

헤르만 헤세의 안식처, 카사 카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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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던 집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아름답다…오랜 세월 지속된 악몽에서 벗어난 것처럼, 나는 여기서 자유, 공기, 태양, 고독과 창작을 호흡한다.” 헤르만 헤세의 산문집 <테신,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그는 카사 카무치에서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헤세는 노년의 삶 대부분을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보냈습니다. 마흔을 넘긴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피폐해진 몸과 마음뿐이었죠. 그는 쉴 곳이 필요했고, 그렇게 카사 카무치의 한 층을 빌려 1919년부터 12년간 이곳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의 삶에 위로가 되어준 루가노 호수를 걸으며 헤르만 헤세는 몬타뇰라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연필이나 펜으로 간단히 드로잉하거나 물감으로 곱게 칠한 수채화가 3,000장에 달합니다. 자연 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은 그는 다시금 책상에 앉아 타자기를 두들겼습니다. 1922년 <싯타르타>를 탈고한 뒤 <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와 같은 대표작을 연이어 발표하며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됩니다. 어쩌면 카사 카무치라는 삶의 안식처가 있었기에, 창작열을 회복하고 작가로서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셈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머물다 떠난 자리엔 그의 손때 묻은 유품과 수채화 원본, 번역본과 초판본을 전시한 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이곳은 그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차를 음미하듯 천천히 머무르기 좋은 공간입니다.

베토벤을 살린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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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낳고 오스트리아가 꽃피운 베토벤은 35년간 비엔나에 머무르며 무려 마흔 번 넘게 거처를 옮겨 다녔습니다. 덕분에 비엔나 곳곳에는 베토벤의 발자취가 남게되었고, 그중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 일명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긴 집입니다. 청력을 잃어가던 베토벤은 의사의 권고로 비엔나 외곽의 하일리겐슈타트에 요양차 머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작품 활동은 계속됐고 결국 극도로 몸이 악화되자 두 명의 동생에게 유서를 남깁니다. 유서를 남긴 이유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자살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음악가로서 청력을 잃는다는 것이 죽음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이 유서를 통해 절절히 전해집니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절대 개봉하지 말라던 유서는 결국 베토벤이 숨을 거둔 뒤에야 발견됐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고 난 4년 뒤 베토벤은 전원교향곡을 세상에 선보입니다. 유서를 쓰고 난 후 오히려 예술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절망을 환희의 음악으로 승화시킨 셈이죠.

당시 베토벤이 유서를 작성하던 공간엔 그의 흔적이 머물러 있습니다.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는 중정을 중심으로 베토벤이 살았던 집과 유서, 머리카락 등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고작 6개월 남짓한 시간을 머물렀을 뿐이지만 이곳에서의 삶이 베토벤을 위대한 음악가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준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