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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을 위한 방황, 일러스트레이터 이진슬

산책 애호가 둘, 일러스트레이터 이진슬과 유물 애호가 김서울과 잠시 동행했다. 산책에 목적을 부여하거나 산책의 의미를 발견하던 여정이다.

Editor 장새론여름
Photographer 최충식

일러스트레이터 이진슬 인터뷰

정착을 위한 방황, 일러스트레이터 이진슬

이진슬의 저서 <온 방향으로 걷기> 서두에는 ‘이방인’이 크게 적혀 있다. 20여 년 부산 생활을 뒤로하고 서울에 정착한 스스로를 지칭한 단어다. 첫 독립, 낯선 도시 생활이 이국만큼 낯설었던 것이다. 정착과 동시에 도시를 알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무작정 걷고 매일 기록했다. 번잡할 때마다 산책하고 사색했다. 그렇게 1년쯤 보내자 많은 게 달라졌다.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자신과 어긋나 있었다. 도시 냄새도 내 살내음처럼 익숙해졌다. <온 방향으로 걷기>는 그렇게 낯선 환경에서 ‘현지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기록이다. 산책을 가장한 도시 적응기인 셈이다. 지금 그는 서울살이 4년 차다. 집 안 화분의 흙이 단단해지고 살림에 윤도 나기 시작했다. 집과 직장 반경 4km 이내의 길은 어깨너비 골목까지 탐색해두었다. 산책을 나서면 기분에 따라 어느 길이든 골라 들어설 자신이 있다. 매일 그림과 글을 남기는 일상도 세수와 양치처럼 익숙해졌다. 이제는 어깨에 긴장을 풀고 조금은 흐느적거리며 걷는 게 자연스럽다. 예전 그대로인 부분도 있다. 걸을 때의 행복감, 발견의 묘미만큼은 그대로이거나, 좀 더 커졌다. 도심에서는 소소한 일상이 갑갑함을 해소할 숨구멍이 되기도 한다. 생활엔 익숙해졌지만 감각은 더 예민해졌다고, 이진슬은 은근한 미소로 말한다. 허리 두드리며 버겁게 일어설 나이에도 아마 지금 같을 거라고, 이진슬은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씨로 덧붙인다. “집에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기보다 움직이는 게 더 편안하더라고요. 밖으로 나서면 일단 볼거리가 있고, 느낄 거리도 새롭게 생기잖아요. 산책이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더라고요. 몸이든 머릿속이든 근질근질할 때는 일단 밖으로 나서요. 세상 구경하러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다 보면 머릿속이 왁자지껄해진다. 두더지잡기게임처럼 이 생각이 솟았다 저 생각이 튀어나오곤 한다. 마땅한 결론도 해법도 없는 그냥 흘러가는 생각들이다. 이럴 때는 걷는 게 답이다. 이진슬은 ‘산책로 부자’다. 도보 생활권에 경의선 숲길과 한강공원이 있다. 정오에 해를 등지고 걸으면 경의선 숲길이, 마주 보고 걸으면 한강공원이 나타난다. 모두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린다. 지금과 달리 서울에서의 첫 집은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동전 넣고 뽑기 하듯 급하게 구한 집이었다. 주변에는 마땅한 공원도, 한적한 거리도 없었다. 살면 살수록 조용한 동네가 절박했다. 두 번째 집을 구할 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수개월간 사방팔방 동네를 탐색했다. 교통이 편리한 곳, 방이 넓은 곳을 두고 밤잠 설치며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산책로가 지척인 지금의 동네를 선택했다. “산책로는 축복 같아요. 환경이 달라지니 삶도 바뀌더라고요. 동네가 느긋한 만큼 감정도 나긋나긋해졌지요. 길 위에서는 서두르는 사람이 드물고 모두가 느긋합니다. 내가 조급한 마음을 안고 있더라도 금세 안정을 찾게 되지요. 타인의 여유에 묻어가게 되거든요.”

한적한 분위기에 이끌리던 경험은 글과 그림으로 되새겼다. 한가로운 시간을 혼자 누리기 아까워, 눈으로나마 나누고자 SNS에 글과 그림을 올린 게 <온 방향으로 걷기>의 시작이었다. 내가 느긋하던 순간의 기록이 위로가 된다거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후기가 돌아왔다. 더 선한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되었고, 꾸준히 기록을 늘려가다 보니 책 한 권을 거뜬히 만들고도 남을 만큼 쌓였다. <온 방향으로 걷기>에는 산책의 팁도 담았다. 아름드리 나무가 늘어선 가로수길로 숲 같은 양재천과 가을 은행잎 카펫이 깔리는 효창공원을 추천한다. 도시를 나름대로 수집하는 방법도 제안한다. 대로보다 골목을 누비고 오래된 간판을 모으듯 그림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자주 바라보는 것. 목적지를 향하기보다 목적을 발견해나가는 여정이다.

“산책을 감히 정의할 수 있을까 싶지만, 어설프게나마 전하자면 ‘내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색감, 패턴, 형태 등 내 주변을 관찰하고 취향을 발견하는 묘미가 있지요.” 이진슬은 거의 매일 산책으로 하루를 끝맺는다.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한 걸음에 피로를 털고 두 걸음에 활기를 충전한다. 그의 설명을 듣자니 문득 행복의 조건을 묻고 싶어졌고, 낯부끄러웠지만 아닌 척 질문을 건넸다. 그림, 커피, 식물, 음악, 향기… 작업실 겸 집을 채운 모든 감각적 요소가 다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산책은 전달하거나 들려주거나 맛보여줄 수 없으니 그저 함께한다. 혼자이든 함께이든 저마다 좋은 게 산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앞선 이의 여유에 이끌려, 뒤따르는 이의 느긋함에 밀려 걷던 시간, 그 여운이 뚝배기의 온기처럼 생생하다. 혼자보다 함께하는 산책이 1% 정도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사색도 함께 남았다. 즐기는 이와의 시간은 언제고 흡족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