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ECIAL

STORY

SEP-OCT 2020

관람자에서 창작자로

조금 거창하게 설명하자면, 관람은 결국 창작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창작물을 관람하며 상상력을 동원해 세계관을 넓히는 일, 관람의 가장 큰 묘미일 테다.

Editor 장새론여름

스토리 copy

주관적인 감상에서 보편적 경험으로

예술은 주관적이다. 작품 탄생부터 완성까지, 작가의 사고와 상상력, 기술적 완성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감상 역시 주관성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한 작품을 두고 누구는 무심하지만 누군가는 감명받고, 또 보는 순간에는 감흥이 없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올리며 저릿하게 감동받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전시장에는 적게는 10점, 많게는 수백 수천 점의 작품이 진열된다. 한꺼번에 모두 소화하기는 힘들다. 보통은 은연중에 시간 제약을 두고 후루룩 스쳐 본다. 그러다 문득 어느 작품 앞에 멈춰 선다. 크기와 색감과 형태 혹은 주제 중 무엇 때문인지는 아직 모른다. 논리보다 감정적으로 ‘그냥 좋다.’ 혹은 좋은지 싫은지 그 무엇 때문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일 때도 있다. 일단 발걸음이 붙잡혔으니 시선을 둔 채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작품이 탄생한 시기를 가늠한다. 작품을 만드는 손과 도구도 떠올린다. 작가가 느끼는 세계, 그 장면과 냄새, 온도를 연상한다. 작품명과 장면을 비교하며 상관성을 찾는다. 그러는 사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눈물이 울컥 차오르면 누가 볼까 눈치를 살피면서도, 깊은 울림이 귀하게 느껴져 오래 붙잡아두려 애쓴다. 화가 강요배의 ‘고원의 달밤’과 장욱진의 ‘까치’, 사진가 김영갑의 ‘잃어버린 이어도’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마음이 붙들린 세 경험 사이엔 적어도 5년에서 10년까지 간극이 있다. 하지만 각각 반응은 복사물처럼 꼭 닮았고, 모두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내면의 감동만큼은 늘 또렷하게 솟아난다. 어디에선가 ‘살아 있는 느낌’을 말하면 꼭 이때를 연상한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다분히 보편적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경험상 유추할 때, 감동의 현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삶의 모든 감명의 순간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과 지식은 쌓이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감정과 감각은 무뎌진다. 친구의 헛기침에도 뱃가죽이 땅기도록 웃던 때가 있었건만 세월이 흐를수록 웃을 일은커녕 울 일도 점차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쉽게 감동받는다는 건 마음이 젊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예술은 감동을 원하는 만큼 의도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수단이다. 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일상을 만끽하고 싶어서라도, 늘 가까이 두고 싶은 친구가 바로 예술이다.

역사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곳

우리 문화에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분명히 구분하지만 유럽에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틀어 ‘뮤지엄(Museum)’이라 부른다. 어원상 뮤지엄은 ‘뮤즈(학예의 신)의 사원’을 의미한다. 신을 기리는 장소이자 기록물과 조형 예술품을 보관하는 수장고가 곧 뮤지엄이었다. 중세 시대까지 뮤지엄은 왕실과 귀족의 수집품을 진열한 공간을 가리키며 ‘컬렉션을 보존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쓰였다. 컬렉션에는 미술품뿐 아니라 건축 유산, 고대 유물, 박물 표본 등이 속했다. 소장품은 일부 예술가와 학자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만 관람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만인이 즐기게 된 지는 300년도 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특권의식이 무뎌지고 계급사회가 무너지면서 성 안에 있는 예술품이 점차 많은 사람에게 공개되었다.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 등이 이 과정을 거쳐 대중적 공간이 되었다. 전시는 인류가 발자국을 찍는 방법 중 하나다. 세계사를 총망라한 박물관이든 작가의 생애를 나열한 기념관이든, 시간을 박제한 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전시는 문자만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시청각으로 생생히 전한다. 그야말로 백 마디 말보다 나은 한 장의 그림, 백 장의 그림보다 나은 한 번의 경험을 선사한다. 소통하기 위해 만든 문자 문명, 빠른 속도를 상상하며 만든 이동 수단, 나아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쟁과 약탈의 역사까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신전 조각들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반출된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 아테네의 수호 여신 아테나를 위해 만들어진 예술품. 말의 갈퀴부터 뒷다리 근육과 관절, 말 타는 사람의 가슴근육과 갈비뼈까지 실제처럼 표현한 조각이다. 손톱 끝 매끈한 곡선은 장인들이 인생을 통째로 바쳐 완성했음을 직감하게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지배 세력이 거듭 바뀌는 사이 작품은 방치되다시피 했고, 1800년경 오스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 토마스 엘긴이 조각들을 다량 런던으로 반출한다. 이를 두고 강대국의 약탈이라는 주장과 오스만제국의 허가 아래 이루어진 합법적 반출이라는 주장이 분분하다. 식민 지배 당시의 약탈물이기에 반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처럼 파르테논 신전 조각만을 주제로 하더라도 장인의 기술, 심미안적 구도, 세계사의 흐름 등 논점에 따라 얼마든지 풍성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리스의 역사적 배경을 심도 깊이 탐구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종교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을 보고 들을지는 전적으로 감상자의 선택이다. 기록은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된다. 가벼운 개인적 감상을 보태자면, 조각가의 미의식과 절박함을 제법 생생히 느꼈다. ‘저 곡선을 조각하기까지 몇 번이나 손톱이 빠졌을 텐데…’ 또 한편으로는 기획자와 실무자, 즉 신전 디자이너와 조각가 사이의 기싸움까지 연상되었다. “예술은 한 점 한 점이 저마다의 세계이기에 예술가들이 많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다양한 세계를 볼 수 있다.” 미술 애호가였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예술은 언어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현상을 선과 면, 색과 빛으로 정의해낸다. 예술에 공감한다는 건 예술가만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의미일 테다. 작품은 작가의 눈을 빌려 관점을 넓히는 수단이 된다. 장욱진의 작품 ‘까치’의 푸르스름한 먹 표현에서 섬세한 관찰력을 포착하거나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광기 어린 전쟁의 황폐함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예술가는 처참하고 비통한 상황이나 역사적 사건들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에 공감할 줄 아는 존재다.” 피카소가 말한 예술가의 공감대를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세계관 역시 이해와 상상으로 한층 넓어질 테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 관람의 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