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ECIAL

STORY

바다, 그 망망대해라는 가능성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 휴식과 즐거움을 얻기까지, 바다를 탐험해온 우리의 역사.

Editor 조정화
Reference <처음 읽는 바다 세계사>(헬렌 M. 로즈와도스키 지음, 현대지성 펴냄)

바다를 상상한다. 정확히는 인류가 닿지 못한 바다의 어딘가를 떠올린다. 계속 소금을 만들어낸다는 맷돌, 용왕님이 산다는 바다 궁전, 반짝이는 비늘이 아름다운 인어 공주, 지도는 있으나 아직 도착하지 못한 보물섬… 저자가 분명한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바닷속이라면 진짜 있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한다. 하늘도 날고 에베레스트에도 오르고 북극과 남극에도 갔지만, 바다만큼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약 40억 년 전 지구에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바다를 다 헤아리겠다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일 터다. 그렇지만 바다는 언제나 궁금증을 품고 용감히 바다와 마주하는 이들을 향해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새로운 바다의 발견

지금의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바다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걸 알지만, 기원전 고대 사람들에게 바다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다. 수평선 너머는 낭떠러지라서 떨어지면 바다 괴물과 조우하거나 지옥에 들어간다고 믿었다. 배를 만들어 항해를 시작한 후에도 바다는 지구를 둘러싼 하나의 전체보다는 육지와 맞닿은 세계의 일부로 여겨졌다. 어업도 교역도 전쟁도 육지와 가까운 연안에서 대부분 이뤄졌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곧 지중해였고, 인도양이란 이름은 지금처럼 큰 바다가 아닌 진짜 인도 연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8~11세기 북유럽 바다를 누빈 바이킹조차 자신들의 항해가 연안에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 다시 북아메리카 대륙의 뉴펀들랜드에 다다랐는데, 이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고 항해 역사에 있어 북대서양을 가로지른 특별한 성취였다. 하지만 바이킹들은 자신들이 크고 거대한 바다를 건넜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바다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15세기에 들어서며 일어났다. 지금의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이 지중해 동쪽을 막아 인도의 무역품을 들여올 수 없게 되면서 다른 길을 찾아 나선 것이 계기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인도를 목적지로 삼은 이유는 향신료 때문이었다. 기원전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유럽에 처음 전해진 향신료는 갈수록 수요가 급증해 당시 금보다도 비싼 사치품에 속했다. 유럽인들은 직접 인도에 가서 금보다 귀하게 취급되는 이 보물을 가져오고 싶었다. 아직 세계의 바닷길을 훤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탐험가들은 저마다 가설을 세워 항해에 올랐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결국 동쪽에 닿아 인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가 내린 곳은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평생 인도로 착각한 콜럼버스는 결국 인도에는 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인도에서 향신료라는 보물을 거머쥔 이는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 1469~1524)였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고, 희망봉을 돌아 1498년 마침내 인도에 당도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 다시 인도로 가는 배를 띄웠다. 마젤란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을 끼고 돌면 금방 인도에 닿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앞서 콜럼버스나 다가마는 댈 수도 없을 만큼 험난했다. 일단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계속된 폭풍우, 선원들과의 갈등으로 남아메리카 남단까지 1년여의 시간이 걸린 데다 서쪽 바다로 가기 위해 들어선 바닷길은 어찌나 좁고 험난한지 약 600km 길이의 해협을 빠져나오는 데 38일이나 소요됐다. 가까스로 벗어난 그는 유럽 사람들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와 마주하게 된다. 드넓고 평온한 바다의 모습에 그는 그 바다를 태평양이라 이름 짓는다. 폭풍우는 다행히 없었으나 지금도 세계 최대의 바다로 꼽히는 태평양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굶주림, 질병과 사투를 벌인 끝에 약 4개월 만에 마젤란 일행은 지금의 괌에 이르렀고 이후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길을 발견한다. 결과적으로 마젤란은 토착민들과 싸우다 필리핀에서 전사해 이 항해를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남은 선원들이 계속 배를 움직여 고국으로 돌아감으로써 인류 최초의 바다를 통한 세계 일주를 완성한다. 세 사람의 대항해는 바다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첫 번째는 대서양 너머는 낭떠러지가 아닌 신대륙으로 이어진다는 것, 두 번째는 바다를 통해 인도로 향하는 길이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바다는 서로 연결된 하나이자 지구를 둘러싼 전체이며 이 때문에 항로를 통한 세계 일주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개척의 대상에서 놀이의 장소로

대항해시대 이후 신대륙으로의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되고, 세계 열강이 식민 지배를 넓히고 수탈한 물품들을 본국으로 들여오면서 해상무역이 급부상한다. 거의 모든 항로가 개척되고, 해군이 창설되었으며, 바다와 관련된 일자리가 무수히 늘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해변은 난파된 함선, 약탈을 일삼는 해적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사람들은 마치 밤의 뒷골목처럼 해변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해변이 오늘날과 같은 휴양지로 떠오른 것은 19세기의 일로 증기선과 증기기관차의 등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838년 증기선의 대서양 횡단이 성공하면서 부의 축적이 아닌 바다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즐기는 항해가 가능해졌다. 1840년대에는 도시와 해변을 연결하는 철로가 놓였다. 하루 일정으로 가볍게 외출할 수 있게 되면서 해변 나들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터너, 모네 등 화가들이 해변에 이젤을 세우고 직접 바다를 보며 풍경화를 그린 것도 이 무렵부터다. 사람들은 나들이 기념품으로 조가비 껍질 등을 주워 집에 장식했고, 아예 바다를 집 안으로 들여 어항 속에 물고기를 기르기도 했다. 1850년대 영국에 등장한 공공 수족관은 1870~1880년대가 되자 유럽 주요 도시들마다 자리하기에 이른다. 1866년에는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요트 경기가 열렸으며, 선원들의 복장에서 착안한 세일러복이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바다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데 해양 문학도 한몫했다. 난파를 당한 로빈슨이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역경과 고난에 맞서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부터 쥘 베른의 <해저 2만리>(1870),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1883) 등 바다를 배경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쓰였다. 사람들은 이제 바다를 선망하고 있었다. 17세기 어느 페르시아 여행자는 자신의 항해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바다의 온전한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환상뿐이다. 환상의 파도에 빠지지 않고 바다 깊은 곳을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바다에 대한 인류의 상상이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에서 정복과 개척의 대상으로, 다시 인간적인 모험과 용기가 발휘되고 스릴과 재미, 힐링이 공존하는 바다의 오늘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