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수록 재미있는 와인의 세계, 정구현 대표
와인을 만들고, 소개하며 넓고 깊은 와인의 세계에 매료된 사람들을 만났다.
와인을 구매하고, 마셔본 적은 있지만 여전히 와인을 어렵게 느끼는 이가 많다. 매번 새로운 와인을 마주할 때마다 궁금해도, 친해지기 어려우니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내추럴보이’라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내추럴 와인숍을 운영하고 있는 정구현 대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와인이 좋다고 말했다. “어릴 적부터 글을 읽고, 공부하는 걸 좋아했는데요. 와인 공부는 끝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구현 대표는 무역업을 하는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해외 음식과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맥주나 막걸리에 친숙했던 여타 대학생들과 달리 와인에도 일찍 관심을 두게 됐다. “항상 향이나 맛에 민감했던 것 같아요. 특히 와인은 향을 마시는 술이잖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와인의 향이나 맛이 변해가는 게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다니면서 ‘소믈리에’라는 비공식 와인 동아리에 가입하고 회장을 맡아 중앙 동아리로 승격시킬 만큼 애정을 쏟았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는 방학 때마다 해외로 나가 현지 와이너리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줄곧 와인 수입사에서 마케팅 담당으로 일해오다 3년 전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의 대표가 됐다. 20년 가까이 와인 하나만을 바라보며 몰입하고, 파고든 진하고 순수한 이력이다.
요즘 인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와인바에 가면 내추럴 와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구현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내추럴 와인은 오직 포도와 포도 껍질의 자연 효모로만 만든다. 우리가 보통 마트나 백화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컨벤셔널 와인은 대량 생산과 일정한 맛을 위해 이산화황이나 비타민 등을 주입하고, 기계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내추럴 와인은 각 지역 토착 품종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 생산을 지양하고, 과거의 맛을 지키기 위해 와인을 만들어요.” 오래도록, 열심히 와인을 마시다 보니 10병 중 9병이 내추럴 와인이었다는 정구현 대표는 개인적인 취향과 사업의 비전을 보고 내추럴 와인숍을 열었다. “오크통에 숙성한 컨벤셔널 와인이 묵직하고 진한 소스를 얹은 스테이크와 어울린다면, 내추럴 와인은 요즘 유행하는 모던한 한식이나 일식, 아시안 음식과 잘 어울려요. 지금 현대인이 먹는 음식과 궁합이 좋은 게 바로 내추럴 와인이죠.” 정구현 대표의 와인숍은 규모는 작지만 매장에 진열된 것만 300종이 넘는다. 들여오는 수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와인은 매장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판매된다.
“몇 년 사이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내추럴 와인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들려오더라고요. 쿰쿰한 냄새가 난다느니, 시큼하기만 하다는 둥 틀린 정보가 퍼져나가는 게 안타까워서 책을 집필하게 됐습니다.” 지난 9월 말에 출간된 책 <내추럴 와인 ; 취향의 발견>은 와인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교과서처럼 두툼한 이 책은 와인 역사를 시작으로 내추럴 와인에 대한 이해와 상식, 이름난 내추럴 와인메이커와 셀러, 산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을 만큼 방대하고 자세한 지식을 담았다.
와인 전문가를 만났으니 여전히 와인을 어려워하는 이를 위한 팁을 전수받았다. “와인을 마실 일이 생긴다면 맛있는 와인과 취향이 아닌 와인을 구분해서 사진을 찍어두세요. 데이터가 쌓이면 와인을 구매하러 가거나 레스토랑에서 본인의 리스트를 보여주면 돼요. 전문가들은 단번에 취향을 파악해서 딱 맞는 와인을 추천해줄 거예요. 다른 방법으로 신맛과 독특한 향이 특징인 사우어나 괴즈 맥주, 전통주를 선호하는 분들이라면 내추럴 와인을 좋아하게 될 확률이 높아요.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와인을 경험하다 보면 분명 자기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수많은 와인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진행하다 마지막으로 연말에 선물하기 좋은 와인을 딱 하나만 추천해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정구현 대표는 단번에 ‘EPONYME 2020’을 골랐다. “프랑스 사부아 지역의 이름난 와인메이커 도멘 벨뤼아르(Domaine Belluard)라는 분이 있는데 코로나19에 걸려 후각과 미각을 잃고 우울증이 심해지더니 2020년에 포도를 수확하고 자살했어요. 최고 생산자가 죽었으니 이 와이너리와 와인은 영원히 사라지는 거예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의 친구 갸느바라는 역시 유명한 와인메이커가 추모의 뜻을 담아 라벨에 그의 뒷모습을 그려넣고, 와인을 대신 만들어줬어요. 그게 바로 이 와인입니다. 2020년에 생산된 이 와인이 벨뤼아르 와이너리의 마지막 와인이죠. 백도, 살구, 흰 꽃향이 어우러져 누가 마셔도 좋은 와인이자 오래 간직하고 싶은 와인이에요.”
정구현 대표는 앞으로도 와인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에 집중해 다양한 와인을 국내 소비자에게 선보일 계획이다. 교육과 시음회도 전보다 자주 열 예정이고, 무궁무진한 내추럴 와인 이야기를 담은 다른 책도 써보고 싶다고. 한 사람의 평생을 매료시킨 와인의 깊고도 진한 매력을 그 어느 때보다 경험하고, 알아가고 싶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