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은 그릇
동경의 대상이던 도자기가 유럽인의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
유럽 최초 그리고 최고의 명품 자기, 독일
서양 식기는 크게 도기, 자기, 본차이나가 주를 이룬다. 이는 주원료에 따른 차이다. 도기는 흙, 자기는 카올린(고령토), 본차이나는 골회(동물의 뼈를 태우고 남은 재)가 핵심 재료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가져온 자기는 단숨에 유럽의 왕후와 귀족들을 매료시켰다. 조개처럼 하얗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자기는 당시 유럽인들에겐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보석’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금과 맞바꿀 만큼 귀한 대접을 받던 자기를 소유하기 위해 유럽의 왕실들은 열을 올렸다. 천신만고 끝에 18세기 초 유럽에서 최초의 자기가 탄생한다. 서양 식기의 새 역사를 연 나라는 독일이다. 작센 왕국의 아우구스트 2세는 연금술사 출신인 뵈트거를 고용해 자기 제작의 핵심 비법이 카올린임을 발견한다. 이후 자기 제조에 성공하면서 질 좋은 카올린이 풍부하게 매장된 마이센에 가마를 짓고 제조법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관리한다. 그렇게 유럽 최초의 자기가 탄생한 도시 마이센은 오늘날까지 명품 자기 브랜드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우구스트 2세의 문장에서 유래한 푸른 쌍검 로고는 독일 명품 식기의 대명사인 마이센(Meissen)을 상징한다. 현재도 핸드 페인팅을 고수하는 마이센의 대표작은 ‘블루 어니언’이다.
창업 초기 디자인임에도 300년 가까이 사랑받아온 초스테디셀러로, 마이센에서 최초로 그린 블루 어니언 문양을 다른 가마들이 앞다퉈 흉내내며 엄청난 유행을 일으켰다. 사실 여기에는 재미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마이센이 모티프로 삼은 중국 자기에는 본래 석류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석류와 비슷해 보이는 양파로 서서히 변해갔고 급기야 다른 가마들이 아예 양파로 모방하면서 어느덧 블루 어니언은 도자기 문양의 한 명칭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마이센의 또 다른 명작으로는 생동감 넘치는 부조 장식이 돋보이는 ‘스완’이 꼽힌다. 웨지우드의 ‘프로그’, 로얄코펜하겐의 ‘플로라 다니카’와 더불어 세계 3대 디너 서비스(식기 세트)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으로 사랑받는 빌레로이앤보흐(Villeroy&Boch)는 독일의 자기 브랜드지만 창업 초기 프랑스령에 세워진 탓에 프렌치 감성이 물씬 풍기는 디자인이 다수다. 18세기 설립 당시 화려함을 앞세운 시류에 편승하는 대신 실용성을 중시한 결과 오늘날에도 현대인의 식탁을 수놓는 명품 식기로 꾸준히 애용된다.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로코코양식, 프랑스
17~18세기 유럽은 중국의 문화가 곧 고급문화로 인식되던 시누아즈리(Chinoiserie)의 시대였다. 시누아즈리는 유럽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오리엔탈 양식을 뜻한다. 유럽 상류층은 값비싼 사치품인 도자기를 수집해 호화찬란한 티 룸을 꾸미는 데 심취했다. 이러한 유행의 선두에는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퐁파두르가 있었다. 예술에 대한 조예와 열정이 남달랐던 그녀는 프랑스의 도자기 생산을 위해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궁정 문화 속에서 탄생한 프랑스 식기는 덕분에 우아하고 세련된 로코코양식이 돋보인다. 로코코양식은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한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귀족 문화의 산물로, 서양 식기의 우아한 꽃무늬 패턴은 대부분 로코코양식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 하나 프랑스 식기에서 눈에 띄는 양식은 나폴레옹 시대 유행했던 앙피르다. 로코코양식이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여성적인 느낌이라면, 앙피르양식은 이집트 문양을 모티프로 남성적이고 직선적이며, 강렬한 색감이 도드라진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자기의 자부심으로 통하는 세브르(Sèvres)는 퐁파두르 부인에 의해 왕립 가마가 된 후 지금까지 왕실(국가)이 운영하는 세계 유일의 브랜드다. 여전히 전통 기법을 고수하며, 프랑스 정부에서 공인받은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자기를 생산해 수준 높은 예술성을 자랑한다. 세브르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놀랍도록 섬세한 그림과 화려한 금채 장식, 그리고 프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짙은 청색과 초록색, 노란색의 오묘한 색 조화다. 특히 마늘즙을 이용해 금가루를 착색시키는 금채 기술은 오늘날까지 세브르를 대표하는 특징이자 자랑이다. 세브르 자기의 25%는 대통령의 외국 순방이나 국빈 선물 등 외교적 목적으로 사용되고, 나머지 75%는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서 주문 제작한 것으로 희소성이 매우 높다.
세브르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도자기 마을인 리모주에는 베르나르도(Bernardaud), 하빌랜드(Haviland), 로열 리모주(Royal Limoges)와 같은 명품 도자기 브랜드가 자리한다. 리모주는 초기에는 세브르에 자기를 납품하는 처지였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디자인과 문양이 다변화하고, 이 지역만의 특별한 흙으로 빚은 얇고 견고한 리모주 자기가 상류층의 취향을 저격하며 높은 위상과 명성을 얻게 됐다. 특히 하빌랜드는 최신 기술을 도입해 리모주 자기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프랑스의 공식 국빈용 식기는 세브르지만, 유일하게 연보라색 제비꽃이 디자인된 하빌랜드의 ‘앵페라트리스 외제니’는 엘리제궁의 공식 디너 만찬에 사용되고 있다.
헤렌드의 역사가 곧 헝가리 도자기의 역사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남서쪽으로 140㎞ 떨어진 작은 도시 헤렌드(Herend).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박한 마을이지만 독일 마이센, 영국 웨지우드, 덴마크의 로얄코펜하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4대 도자기 브랜드가 탄생한 곳이다. 헤렌드의 도자기 역사는 다른 도시에 비해 1세기 넘게 뒤처진 악조건 속에서 태동했다. 이는 당시 헝가리를 지배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이 빈 이외의 도시에서 자기 제조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창업 당시 헤렌드는 크림웨어(영국에서 탄생한 크림색 도기) 제작소로 출발했다. 이후 뛰어난 사업 감각을 지닌 몰 피셔가 경영자가 되면서 1840년쯤 고급 자기를 제조하기 시작했고 헤렌드는 승승장구한다. 런던, 뉴욕,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연달아 최고의 평가를 받으면서 동유럽의 작은 시골 공방은 단숨에 유럽의 스타로 떠오른다. 특히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눈에 띈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제1회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헤렌드의 시누아즈리 디너 서비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마음을 빼앗았다. 동양풍으로 그려진 꽃과 새, 나비와 같은 시누아즈리 문양을 헤렌드만의 참신하고 독자적인 스타일로 선보인 ‘빅토리아 부케’는 영국 왕실 식탁에 오르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제작된 퀸 빅토리아 라인을 비롯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주문을 받아 탄생한 ‘로스차일드 버드’, ‘빈의 장미’ 등 헤렌드의 초창기 디자인은 오늘날까지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스테디셀러다. 모든 제품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깐깐한 품질 검사를 통과한 완성품 중에서 20~30%는 불량으로 처리할 만큼 여전히 제품의 퀄리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헤렌드가 세계인이 사랑하는 명품의 이미지라면, 졸너이(Zsolnay)는 헝가리 국민이 사랑하는 도자기 브랜드다. 좀 더 소박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도자기와 더불어 헝가리 전역의 유명 건축물 대부분이 졸너이 타일을 사용할 만큼 세라믹 타일의 품질도 명성이 자자하다.
실용성을 겸비한 심플함, 북유럽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단순함, 자연 친화적이며 뛰어난 실용성과 견고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은 북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한다. 매일 사용해야 하는 식기 역시 이 공식을 따른다. 자연이 연상되는 차분한 컬러와 단순한 곡선이 주는 편안함, 오븐과 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성은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북유럽 식기의 매력이다. 애지중지 장식장에만 고이 모셔두는 존재가 아닌, 그릇으로 그 쓰임을 다하는 예술성을 품은 공산품에 가깝다. 북유럽을 대표하는 식기 브랜드로 덴마크의 로얄코펜하겐과 핀란드의 아라비아, 이딸라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핀란드 기업 피스카스 그룹 산하에 속한다.
1775년 로얄코펜하겐은 덴마크 최초의 자기 공장으로 설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덴마크 왕실의 후원을 받는 왕립 자기 공장으로 변신한다. 왕실에서 사용할 식기와 외국 왕실에 선물할 용도로 제작되며 최고급 품질과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국가 재정이 파탄 위기에 처하자 왕실은 로열 칭호를 브랜드명에 쓸 수 있는 조건으로 민간 기업에 매각한다. 로얄코펜하겐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푸른색 꽃무늬가 떠오를 만큼 ‘블루 플루티드’ 시리즈는 불멸의 스테디셀러다. ‘플루티드’란 도자기 표면에 파인 세로 홈을, 플레인은 복잡한 문양 없이 단순한 형태를 일컫는데, 블루 플루티드의 원조는 사실 마이센이다. 18세기 초반 마이센이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티프로 그렸으나 경영이 힘들어지면서 로얄코펜하겐에 매각했다. 블루 플루티드 접시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선 1,200번의 붓질이 필요할 만큼 정교한 공정으로 유명하다.
언뜻 핀란드의 아라비아(Arabia)와 이딸라(Iittala)는 구분이 쉽지 않을 만큼 비슷해 보이는데, 카이 프랑크를 공통분모로 하기 때문이다. 아라비아의 황금시대를 연 인물로,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과 기능성, 실용성을 겸비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특히 킬타(오늘날 이딸라에서 ‘띠마’라는 이름으로 판매) 시리즈는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이다. 유리 공방으로 첫발을 뗀 이딸라는 지금도 유리 제품의 90%를 핀란드 남부 이딸라 공장에서 제작하는데 특히 ‘아이노 알토’ 텀블러가 유명하다. 핀란드 대표 건축가 알바 알토의 부인이자 디자이너였던 아이노 알토가 호수에 던진 돌이 만들어낸 파장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유리컵으로, 90년이 지난 지금도 편한 쓰임새와 디자인으로 꾸준히 사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