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고 느끼고 마셔라
온몸으로 즐기는 와인, 그 축제의 현장을 찾아서.
와인으로 물든 전투
스페인 ‘아로 와인전투 축제’
타오르는 태양, 뜨거운 열정이 가득한 스페인. 풍부한 문화유산과 웅장한 건축물, 아름다운 해변을 품은 스페인은 언제 찾아도 매력적인 여행지다. 특히 스페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다양한 축제다.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도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려 ‘스페인은 축제가 열리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할 정도.
매년 6월이 되면,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아로(Haro)에선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서로의 몸에 와인을 뿌리며 ‘전투’를 벌이는 이색적인 축제가 열리는 것. 바로 스페인 ‘아로 와인전투 축제’의 모습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로 와인전투 축제는 말 그대로 와인으로 전투를 벌이는 이벤트다. 과거 아로 지역에서 두 마을 간 전쟁이 있었는데, 치열했던 전쟁이 끝난 후 서로를 향한 분노와 증오를 없애기 위해 서로에게 와인을 붓는 의식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전투’라는 단어가 다소 거칠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화해와 용서의 의미가 담겨 있는 전통 축제인 셈. 세상에 단 하나뿐인 ‘와인전투’를 즐기기 위해 전 세계 곳곳의 소위 ‘와인 러버’들이 이곳 아로마을로 향한다.
축제 당일 오전 7시, 이른 아침이지만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다. 축제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특별한 드레스 코드다. 바로 흰색 상의에 빨간색 스카프를 두르고 참가해야 하는 것. 물론, 축제가 끝나면 입고 온 흰색 상의 그대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다. 모두 와인으로 흠뻑 물들기 때문. 이제 축제의 문을 열 시간, 전통 의식에 따라 다 함께 합동 미사를 치르는 것으로 축제의 막이 오른다. 사람들은 각자 챙겨온 양동이, 물총, 분무기 등을 이용해 와인을 뿌리기 시작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와인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분명 전투임에도 웃음과 장난기가 가득하다. 몇 시간 동안 진행된 핏빛 전투에 사용된 와인은 무려 6,000리터. 전투를 치른 후에는 와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 음악, 춤을 즐기는 시간이 이어진다.
스페인의 열정을 닮은 아로 와인전투 축제.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 가능하고 와인을 좋아하지 않아도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은 이에게 추천한다.
11월이 기다려지는 이유
프랑스 ‘보졸레 와인 축제’
와인을 이야기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다. 기후, 토양, 강우량, 습도 등 포도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어 ‘세계적 와인 생산지’, ‘와인의 왕국’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가장 남쪽에 위치한 보졸레(Beaujolais) 지역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도 생산지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보졸레 누보’인데 여기에서 ‘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움’을 뜻한다. 보졸레에서 생산된 새로운 와인, 즉 그해의 첫 포도주라는 이야기다. 보통 6개월 이상 숙성시킨 뒤 마시는 일반 와인과는 달리 9월 초에 수확한 포도를 약 4~6주간 숙성시킨 뒤 바로 마실 수 있는 ‘신선한’ 와인인 셈. 따라서 그해에만 마실 수 있다는 희귀성과 신선한 포도의 맛과 향을 경험할 수 있다는 특이점 때문에 보졸레 누보의 출시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가 많다.
보졸레 누보는 원래 이 지역의 농부들이 즐겨 마시던 전통 와인이다. 갓 생산한 와인을 포도주통에 바로 부어 마시는 전통을 살려 축제로 만들었다. 1951년 시작된 보졸레 축제는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와인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 “보졸레 누보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멘트가 울려 퍼지며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축제에는 와인을 든 농부들의 행진, 전통 의상을 입은 지역 주민들의 가장행렬 등 볼거리뿐 아니라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를 비롯한 다양한 먹거리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산지에서 직접 마시는 햇와인의 신선한 맛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터. 천천히 음미하는 대신 벌컥벌컥 음료처럼 마실 수 있는 와인이기에 웃고 뛰고 춤추며 캐주얼하게 즐기기에도 좋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손꼽아 기다리는 와인, 보졸레 누보. 세계 각국에서도 보졸레 누보 출시를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진행된다. 1년을 기다린 보람과 연말을 시작하는 설렘을 한잔 가득 담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기쁨을 만끽해보길.
화이트 와인의 성지
독일 ‘모젤강 와인 축제’
독일 하면 가장 먼저 맥주가 떠오르는 탓에 독일이 세계 10대 와인 생산국이라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화이트 와인, 특히 리슬링(Riesling)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독일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은 약 1,500여 곳, 그중에서도 모젤강 유역은 독일에서 가장 좋은 와인 생산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독일의 서남부 코블렌츠와 트리어를 지나 룩셈부르크, 프랑스 로렌 지방까지 이어지는 모젤강은 545km의 길고 아름다운 강이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탓에 휴양지로도 인기가 높다.
모젤강을 끼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특이한 건 밭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지녔다는 점이다. 사실 독일은 위치상 높은 위도에 자리하고 있어 낮은 온도, 부족한 일조량으로 포도 재배에 적합한 기후는 아니다. 그럼에도 세계 8위 수준의 와인 생산량을 자랑할 수 있었던 건 포도밭의 경사에 숨겨진 비밀 덕분이다. 가파른 경사지에 포도를 심어 조금이라도 오래 햇빛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강에서 반사된 빛으로 부족한 일조량을 채웠던 것. 특히 리슬링은 추위에 강한 품종으로 싹이 늦게 나와서 독일의 환경에는 안성맞춤. 이렇게 자연과 사람이 힘을 합쳐 빚어낸 와인은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독일의 가장 큰 와인 산지답게 모젤강 지역에선 매년 9월 첫째 주, 화려한 와인 축제가 열린다. 4일간 진행되는 축제 기간 동안 약 20만 명이 참여할 만큼 세계 와인 마니아들 사이에선 유명하다. 각국에서 온 100여 개 그룹의 와인 행렬과 와인 퀸 즉위 퍼레이드, 모젤강 중부 지역의 와인 거리 재현 행사, 수공예 마켓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돼 있다.
아름다운 모젤강과 빼어난 경치는 축제를 한층 더 빛내준다. 모젤강 주변을 둘러보면 경사면을 따라 정갈하게 정리된 그림 같은 포도밭과 아기자기한 마을이 어우러져 와인을 맛보기도 전에 풍경에 먼저 취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낭만과 열정 그리고 와인
아르헨티나 ‘벤디미아 와인 축제’
남미에서 가장 중요한 와인 산지를 품은 아르헨티나. 낭만과 열정 그리고 축구로 기억되는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수식어는 ‘세계 5위 와인 생산 국가’이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쪽으로 1,050km, 안데스 산맥 동쪽에 위치한 멘도사(Mendoza)는 ‘포도주의 땅’이라 불린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70%를 생산하며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 산지다. 해발 600~1,600m에 위치해 높은 고도와 큰 일교차로 산도가 뚜렷하고 강렬한 향의 와인이 생산되는데, 그중에서도 말벡(Malbec)이 가장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멘도사에서는 매년 ‘벤디미아(Vendimia)’라는 성대한 와인 축제가 열린다. 보통 와인 축제는 9~10월에 열리는데, 남반구라는 지역적 특성상 3월에 개최된다는 점이 다르다. 축제의 기원은 17세기 수확에 감사하는 종교의식에서 비롯됐다. 이후 1936년 정부 차원에서 공식 축제로 재개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 축제로 발전했고, 최근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10대 수확 축제’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으로 시작된 벤디미아는 한시도 눈 돌릴 틈 없이 화려한 볼거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양한 전통 의상과 노래로 꾸며진 축제 행렬이 하루 종일 이어지고, 각 지방 대표 미인들이 각종 햇과일을 나눠주는 카퍼레이드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건 멘도사 미인대회. 각 소도시 대표 중 최고의 미인을 포도의 여왕으로 선정하는데 1년 동안 멘도사 와인 홍보대사로 활동하게 된다.
탱고 공연, 가수 콘서트, 불꽃놀이 등 사흘간의 축제는 쉼 없이 이어진다. 누구보다 축제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진심을 다해 즐기는 지역 주민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땀 흘려 수확한 작물을 이웃과 나누고 포도 한 알에도 행운을 담아 건네는 그들의 순수한 모습이 맑고 깨끗한 아르헨티나 와인과 닮아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는 특별한 축제, 벤디미아. 아르헨티나 와인의 매력에 빠질 준비가 되었다면 이른 봄, 멘도사로 향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