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의 계절, 풍성한 열매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계절, 가을. 이 계절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과일 이야기를 따라가보는 시간.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을 보낸 탓인지, 가을이 더욱 반가운 요즘이다.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인 느낌이다. 손등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붉게 물드는 풍경, 과실 익어가는 냄새, 귀뚜라미 소리까지.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며 반가운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한다.
나무마다 주렁주렁 맺힌 열매가 붉게 여물고, 바람에 황금 들녘이 일렁이는 가을 풍경은 풍요로움 그 자체다. 치열하게 보낸 여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더 붉고 탐스러운 결실이 가을을 수놓는다. 사과, 감, 배, 머루, 유자, 석류 등 이맘때 만날 수 있는 햇과일도 가을이 주는 귀한 선물.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나와 봄과 여름의 햇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마침내 맺은 결실이기에 더욱 반갑다. 작은 열매 하나에는 한 해 동안 농부가 흘린 땀과 노력, 햇빛, 물, 땅, 바람까지 온 우주가 담겨 있다. 결실의 계절, 잘 익은 가을 한입 베어 먹고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인간을 매료시킨 과일의 매력
과일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달콤한 맛과 다양한 식감, 흥미로운 생김새와 색깔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다. 종교나 신화 속에도 과일이 등장하고,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 역시 과일을 먹어서였으니,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과일에 매료된 듯하다.
과일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 유적에는 각종 과일 화석과 씨앗이 발견돼 오래전부터 과일을 채집해 먹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과일나무를 오가며 자연으로 하여금 열매를 선택하고 번식하도록 도운 게 동물이라면, 인간은 야생의 과일을 집과 정원, 과수원으로 끌어들였다.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과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고 접목을 통해 다양한 품종을 만들어냈다.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는 과수원을 “과일나무와 나무들을 돌보는 사람 사이에서 펼쳐지는 매우 독특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무대”라고 정의한다. 수많은 사람이 흘린 땀과 노력으로 자연과 협력해 만들어낸 예술품이 바로 과일이라는 의미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인간과 과일을 함께 진화시켰다.
오늘날 과일은 우리 일상의 식단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 등 많은 영양소가 들어 있어 우리의 건강을 지키고 삶의 질을 높여준다. 과일의 고운 빛깔과 다양한 생김새는 흥미롭고 과일을 먹는 경험 역시 다채롭고 보람 있다. 풍부한 과즙과 새콤달콤한 맛으로 여전히 과일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역사 속 이야기 한 바구니
오랜 역사만큼 과일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하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수박 도둑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엄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 어렵게 들여온 수박 종자는 국력을 좌지우지하는 오늘날의 첨단 기술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한 통 가격이 쌀 다섯 말에 이를 정도로 비싼 데다 어렵게 키워낸 수박이니, 제아무리 인자한 세종대왕이라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수박 한 통 훔친 내시는 곤장 100대와 유배라는 엄청난 중벌을 받아야 했다.
16세기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모든 부부가 반드시 과일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돌봐야 했다. 과일 재배 장려를 위한 법 때문이었는데, 이를 어길 시 결혼할 수 없었다고 한다. 1740년 독일 프리드히리 대왕은 한발 더 나아가 심지 않은 과일나무에 벌금을 부과하거나 농부 한 명당 매년 열 그루의 어린 과일나무를 강제로 심게 했다고 전해진다.
새콤달콤한 자두가 한때 프랑스에서는 찬밥 신세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자두 한 알보다 달걀 두 알을 먹는 편이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자두나무가 못생긴 데다 변비 치료제라는 이미지가 이유였다. 오늘날 그 효능 때문에 일부러 자두를 먹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두의 진가를 알아본 건 예술가들이었다. 자두가 지닌 다양한 빛깔과 미묘하게 빛나는 음영에 매료되어 다채로운 정물화를 탄생시켰다. 이처럼 과일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곤 했다. 반 고흐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 머무를 당시 주변의 다채로운 과수원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한 달 만에 14점의 과일나무를 그리는가 하면 올리브를 재배하는 사람을 관찰해 15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꽃이 핀 과수원의 황홀한 장면을 묘사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과수원’은 지난해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대 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에게 사과는 매우 중요한 소재였다. 사과가 썩을 때까지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건 너무나 유명한 일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커튼, 항아리와 과일 그릇’, ‘사과와 오렌지’ 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물화를 남겼다. <과수원에서>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과수원을 완벽히 평화로운 장소로 칭송했고 많은 인상파 작가들에겐 피난처이자 사색을 위한 장소로 존재했다. 봄이면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가을이면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과실나무의 생명력이 수많은 예술을 꽃피운 셈이다.
간편하거나 특이하거나
집 나와 독립한 후로는 과일 먹는 일이 드물다. 생각보다 과일 챙겨 먹는 일이 쉽지 않다. 과일 껍질 처리하는 것도 번거롭고, 과일 한 봉지를 사기엔 그 양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미니 사과’. 테니스공보다 작은 크기에 껍질도 연해 씻어서 바로 먹으면 그만이다. 작아진 건 사과뿐만이 아니었다. 미니 참외에 이어 한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작은 애플수박도 올여름 큰 인기를 끌었다. 1인 가구의 증가와 함께 작고 간편한 소포장을 선호하는 트렌드가 과일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다. 껍질을 깎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의 인기도 두드러진다.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딸기와 포도의 판매량이 사과를 넘어선 것. 다양한 과일을 조금씩 모두 맛볼 수 있는 컵과일에 이어 과일을 커팅해서 담아주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말 그대로 귀차니즘이 과일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매년 새로운 과일을 만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언젠가부터 SNS를 중심으로 새롭고 특이한 과일 인증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올해 주인공은 바로 납작복숭아다. 이름 그대로 납작하게 눌러놓은 듯한 모양에 강한 단맛이 매력이다. 원래 납작복숭아는 유럽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과일이었는데, 국내 재배에 성공하며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겉과 속이 다른 신비복숭아도 ‘인싸 과일’로 통한다. 겉은 천도복숭아인데, 속은 백도복숭아처럼 달고 부드러운 게 특징. 반대로 생김새는 신비복숭아와 비슷하면서 속은 노란 신선복숭아도 인기다. 이렇게나 종류가 많으니 이제 ‘물복’과 ‘딱복’만으로는 복숭아를 논할 수 없게 됐다.
다양하게 즐기는 색다른 경험
과일도 색다르게 즐기는 시대다. 최근에는 꼬치에 과일을 끼운 후 물엿을 묻혀 굳힌 ‘탕후루’가 대세다. 일명 과일꼬치라고 불리는 탕후루의 매력은 설탕 코팅의 바삭함과 달콤한 과육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 여름에는 망고, 멜론, 딸기를 듬뿍 넣은 과일빙수를 즐기고, 생과일 주스는 사계절 내내 사랑받는 메뉴다. 빵, 케이크, 샌드위치에도 과일 토핑이 빠지지 않고, 새로운 과일이 나올 때마다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노을멜론, 푸레, 블러드오렌지, 피치애플, 플럼코트 등 이름만 들어선 도무지 알 수 없는 과일도 수두룩하다. 기존 과일을 변형시키거나 두 가지의 과일을 접목시켜 탄생한 새로운 과일이 맛과 경험의 신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셈이다. 눈과 입이 즐겁고 고르는 재미를 더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진 과일의 매력이 돋보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