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기행
맛있는 지구촌 채소 요리에 담긴 영양 만점 비하인드 스토리.
소박한 가정식에서 프랑스 대표 음식으로, 라타투이
한가롭기 그지없는 전원 풍경이 매력적인 프로방스는 연중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온갖 채소가 쑥쑥 자란다. 자연스레 채소를 활용한 요리가 과거부터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음식이 라타투이(Ratatouille)다. 프로방스 방언으로 ‘섞다’, ‘잔뜩 넣다’라는 뜻의 ‘Ratouiller’, ‘Tatouiller’에서 파생된 라타투이는 말 그대로 다양한 채소를 섞어 만드는 음식을 뜻한다. 오늘날 프랑스 대표 음식 중 하나로 위상이 높아졌지만, 사실 라타투이는 가난한 서민 음식 중 하나였다. 18세기 빈곤한 프로방스 농부들은 밭에서 딴 가지, 토마토, 파프리카, 양파, 주키니 호박 같은 채소를 대충 썰어 뭉근하게 끓인 채소 스튜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다. ‘투박하고 맛없는 스튜’라는 꼬리표는 20세기 들어오면서 ‘프랑스인이 사랑하는 가정식 메뉴’라는 타이틀로 바뀌었다. 기존의 스튜처럼 끓여 먹는 방식이 아닌 오븐에 굽는 새로운 레시피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라타투이 레시피는 맛과 비주얼 면에서 크게 2가지로 나뉜다. 먼저 스튜 버전은 뭉근하게 익은 채소 고유의 단맛과 부드러운 식감을 경험할 수 있다. 두 개의 팬을 준비해 하나는 채소를 한 가지씩 올리브오일에 볶아 고유의 맛을 한껏 끌어올린 뒤 다른 팬에 볶은 채소를 모두 옮겨 담아 허브를 추가해 뭉근하게 끓인다. 반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라타투이는 오븐에 굽는 방식의 콩피 비얄디(Confit byaldi) 버전이다. 콩피 비얄디는 라타투이 변형 요리로, 손님 접대나 본식 요리 메뉴로 선보이기 좋은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우선 가지, 토마토, 파프리카, 양파, 호박 등 신선한 채소를 얇게 썰어 그릇에 겹겹이 담는다. 이때 색 조합을 고려하되 그릇에 여백 없이 빼곡하게 채우는 게 포인트. 여기에 마늘과 각자 취향에 따른 허브(타임, 로즈메리, 바질 등) 그리고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뿌린 후 오븐에 서서히 익혀내면 채즙과 향신료가 빚어내는 풍부한 맛과 바삭한 채소 식감이 입안에서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삼삼한 듯 담백한 채소 고유의 맛과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라타투이는 오늘날 프랑스 가정식을 넘어 전 세계 채식주의자들이 사랑하는 메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식욕과 기운을 돋우는 여름 보양식, 스페인 가스파초
덥고 건조한 스페인의 여름 별미이자 원기 회복에 도움을 주는 대표적인 음식이 가스파초(Gazpacho)다. 토마토, 오이, 양파, 피망, 마늘과 같은 여러 채소를 믹서기에 갈아 올리브오일, 식초, 소금으로 간을 맞춘 후 냉장고에 넣어두고 차게 먹는 음료이자 수프다. ‘마시는 샐러드’라 불릴 만큼 채소의 비타민과 섬유소 함량이 높고, 새콤한 맛이 식욕을 돋우며 갈증을 달래기에 더할 나위 없어 스페인 사람들의 여름 식탁에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가스파초는 원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엄밀하게는 이슬람에서 전파된 음식이다. 안달루시아는 8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는데, 12세기에 요리법이 전해지면서 스페인 전통 요리로 자리 잡았다. 가스파초라는 명칭은 아라비아어로 ‘젖은 빵’이라는 뜻이다.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 본래 음식의 주재료는 채소가 아닌 빵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빵과 마늘, 올리브오일, 물을 넣어 만든 마늘 수프에 가까웠으나, 여기에 식초를 첨가하고 채소를 넣으면서 점차 스페인식으로 변화했다. 여전히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채소와 함께 갈아 걸쭉한 느낌의 가스파초를 즐겨 먹는다.
가스파초가 스페인의 여름 보양식으로 불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토마토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로, 신대륙으로부터 토마토가 전파된 지 수 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토마토를 식재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가스파초에 토마토가 들어간 것도 이때부터다. 스페인 일부 지역에서는 토마토 대신 견과류를 넣거나 고추, 아보카도, 포도 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 만든 가스파초를 즐긴다. 보통 가스파초는 만든 직후 바로 먹기보단 냉장고에 하루 숙성해서 차게 먹는 편인데, 바로 먹을 때는 얼음을 갈아 넣기도 한다. 먹다 남은 가스파초는 그 자체로 훌륭한 파스타 소스로 활용 만점이다.
채식주의자의 소울 푸드, 인도 팔락 파니르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는 나라, 인도는 드넓은 영토만큼이나 다양한 민족, 종교, 계층이 혼재돼 있다. 자연스레 음식 문화도 천차만별이다. 크게는 남부와 북부로 구분되는데, 남부는 소고기를 금하는 힌두교가 북부에는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슬람교도가 다수다. 종교적인 이유로 금하는 식재료를 제외하고, 인도 전역엔 향신료와 콩류, 유제품을 활용한 채식 요리가 전반적으로 골고루 발달해 있다.
인도 요리의 정체성은 향신료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기가 들어간 요리든, 채소 요리든 음식의 맛은 어떤 향신료를 넣느냐에 달렸다. 사시사철 무덥고 습한 기후에서 음식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인은 수많은 가짓수의 향신료를 요리에 첨가한다. 인도 요리의 기본 중의 기본인 마살라는 다양한 양념을 일정 비율로 혼합해 만든 기본 향신료를 뜻한다. 가정집마다 고유의 레시피에 따라 배합된 마살라를 요리에 활용한다. 특히 매운맛이 나는 가람 마살라는 인도 요리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마살라로, 육두구, 정향, 카다멈, 커민, 계피, 통후추, 회향, 코리앤더(고수 씨), 바질, 오레가노, 월계수, 로즈메리가 들어간다.
인도의 수많은 채식 요리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또 인기 있는 메뉴가 팔락 파니르(Palak Paneer)다. 팔락은 힌디어로 시금치, 파니르는 숙성하지 않은 신선한 인도식 코티지 치즈를 가리킨다. 일명 ‘시금치 커리’로 불리는 팔락 파니르는 시금치 베이스에 마살라와 크림, 파니르 치즈를 더해 크리미한 질감과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오늘날 전 세계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는 호불호 없는 인도의 채소 요리인 것. 요리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인도 북부 펀자브 지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시금치는 페르시아인에 의해 인도로 전해진 후 높은 영양가와 맛이 인기를 끌면서 인도 요리의 주 식재료로 사랑받게 됐다. 그 결과 팔락 파니르 역시 인도 북부 지역의 전통 요리에서 점차 다른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특히 인도의 채식주의자들에게 팔락 파니르는 섬유질과 단백질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영양 만점 건강한 커리 요리의 표본이다.
태국의 채식 축제, 그리고 팟팍붕파이뎅
태국 국민의 95%는 불교 신자로, 육식이 종교적 금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이유 혹은 건강,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동물 보호를 위해 채식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세계의 부엌’이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 태국의 채식 요리는 꽤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우선 다양한 향신료와 소스를 활용하는데 거침없다. 코코넛 밀크, 타마린드, 간장, 고추, 마늘, 설탕, 라임즙 등 소스 조합에 따라 매콤하고 상큼한 맛이 미각을 자극한다. 사시사철 비옥한 땅에서 풍족히 자라는 채소와 과일 덕분에 신선한 샐러드나 볶음 요리 종류도 셀 수 없다. 방콕 시장에 가면 노란 간판이나 깃발에 쩨()라고 적혀 있는 곳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채식 반찬만을 파는 가게다. 각종 채소볶음과 커리, 두부 요리를 비롯해 고기 맛과 거의 흡사한 대체육으로 만든 각종 요리가 먹음직스럽게 쌓여 있다. 방콕 내에만 오롯이 채식을 선보이는 비건 식당과 카페가 35곳에 달하고 그 수도 점차 느는 추세다.
태국의 채식 문화는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 음력으로 9월 1일~9일 사이에 열리는 채식 축제(Tesagan Gin Je Festival)가 대표적인 예다. 총 9일 동안 열리는 채식 축제에서 선보이는 음식은 하나같이 육류를 비롯한 달걀, 유제품, 해산물이 제외된 엄격한 비건 식단으로 차려진다. 마늘이나 양파처럼 향이 강한 채소도 금한다. 채식 축제의 기원은 19세기 태국 남부 지역에 들어온 중국인에 의해 시작됐다.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이들이 채식 식단을 고수하며 9명의 황제 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회복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중국계 태국인이 많은 푸껫에서 축제가 시작됐고 이후 태국 전역에서 기념하게 됐다. 오늘날에는 종교적 수양의 의미보다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건강한 채식을 경험하는 일종의 푸드 페스티벌에 더 가깝다.
태국의 수많은 채소 요리 가운데 낯선 이방인의 입맛을 단박에 사로잡는 요리가 팟팍붕파이뎅(Pad Pak Boong Fai Daeng), 우리말로 공심채볶음이다. 공심채는 시금치처럼 길쭉한 잎을 가진 줄기 속이 텅 빈 채소로, 섬유질과 비타민,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동남아시아 요리에서 즐겨 사용되는 식재료다. 아삭한 식감이 별미인 팟팍붕파이뎅은 태국인이 사랑하는 가정식 반찬 중 하나다. 웍에 기름을 두른 후 마늘과 고추, 공심채를 넣고 간장, 굴소스, 된장, 설탕, 그리고 감칠맛을 더하는 피시소스를 뿌려 재빨리 센 불에서 볶아내면 완성이다. 우리네 입맛에도 잘 맞아 파파야 샐러드로 불리는 솜땀과 함께 태국 식당에서 무조건 주문해야 하는 사이드 메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