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품에 책을 안기다, 이은정 사서
시장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삶, 다양한 이야기에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귀 기울인 두 사람을 만났다.
이은정 사서의 하루는 시장에서 시작된다. 매일 아침,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가락시장에서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 우리나라 최대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인 가락시장은 전국 각지에서 생산한 농수산물의 유통과 경매를 담당하고 있다. 시장의 규모도, 매일 올라오는 농수산물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 경매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고, 아침이면 대부분의 물량이 전국 각지로 흩어진다. 매일 아침 수급되는 농수산식품의 양과 품질, 가격 동향을 관측하는 게 이은정 사서의 업무다.
“농수산식품은 보통 여섯 단계를 거쳐 가격이 결정돼요. 생산자가 가져온 물건은 경매를 통해 낙찰가, 즉 기준가가 정해지죠. 최초 가격이 결정된 후 소매점으로 넘어가고 소비자에게 판매를 하면서 다시 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거쳐요. 농수산식품의 가격 동향을 파악하고 관측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매일 아침 담당 구역의 상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간혹 공시 가격이 불만족스러울 땐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요.”
매일 아침 상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시장이 곧 일터인 이은정 사서에게 매일 아침 반복되는 시장의 분주함은 일상이 된 지 오래. 유통 현장에서의 일이 체질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의 오래된 직업은 도서관 ‘사서’였다.
두근두근 첫 방송
언론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은정 사서는 2014년부터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 일해왔다. 산하 교육원 내 농식품전문자료실에서 7년간 사서로 근무했다. 전문자료실이라고 하면 특별할 것 같지만 운영 면에서도 일반 도서관과 다르지 않다. 다만 보유하고 있는 책과 자료의 주제가 ‘농식품 유통’이고 이를 필요로 하는 이용자가 특정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때문에 이용자의 요구를 파악하고 요구에 맞는 소장 자료를 선택하기에 노력이 필요했다. 운영에 대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어떻게 하면 도서관 이용자를 늘릴 수 있을지가 늘 고민이었다.
“농식품전문자료실을 운영하며 이용자를 늘리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농식품 유통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시거든요.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이곳에 가득한데, 직접 오시라고 해도 시간 내기가 힘든 분들이 많죠. 그래서 늘 고민이었어요.”
자료실을 지역사회에 개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내부 보안 문제로 할 수 없게 되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내가 책을 들고 현장으로 가면 어떨까?’
하지만 농식품과 독서라는 주제가 선뜻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데다가 다짜고짜 찾아가 책을 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마침 지인으로부터 수원의 못골시장에서 상인들이 방송국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직접 찾아갔다.
“처음 상인회를 찾아가서 책 읽어주는 방송을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익숙하지도 않고 처음 시도하는 거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방송팀장님이 대본을 한번 써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무조건 잘 써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30권 넘게 읽은 것 같아요.”
방송 허락은 받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았다. 기계도 다룰 줄 알아야 했고, 대본 연습도 해야 했다. 시장이 끝난 저녁 시간을 이용해 수없이 연습하고 녹음에 들어가려는 찰나, 여름철 습도에 약한 녹음기가 고장나는 바람에 결국 첫 방송은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첫 방송에서 읽은 책은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소설이었어요. 항상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감동받고 울었거든요. 시장 상인들도 공감해주실 거라 생각해서 준비했죠. 하지만 어찌나 떨리던지, 방송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서 사고는 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진심을 다해 방송을 준비했지만, 시장 상인들은 어떻게 들었을지, 또 반응은 어땠을지 항상 궁금하고 걱정됐다. 직접 반응을 살피고 오라는 방송팀장의 얘기에 방송 중 노래가 나가는 시간에 밖으로 나가기를 여러 차례. 방송이 끝난 후 팀장과 칼국수를 먹으러 갔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실수하진 않았는지, 방송은 괜찮았는지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가만히 있으니까 팀장님께서 그러시는 거예요. ‘장사하는 데 걸림돌이 됐거나 맘에 들지 않았으면 바로 항의나 민원이 들어왔을 거다. 그런데 아무 얘기가 없다는 건 잘하고 있다는 거다’라고요. 그제서야 칼국수 맛이 느껴졌어요.”
‘시장 사람’, 다시 시장으로
시간이 지나자 ‘읽어주는 책’ 방송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고,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쌓였다. 방송국은 못골시장 내 못골카페 안에 위치해 있어 방송을 하다 보면 카페에 들르는 손님을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다. 방송을 들으시던 할아버지 손님이 옛날 생각이 난다며 메뉴에도 없는 ‘노른자 띄운 생강차’를 주문하시는 바람에 카페 사장님이 노른자를 구해와야 했던 이야기, 가자미 책을 읽었던 날, 방송이 끝나자마자 가자미를 많이 팔아 대박났다는 생선가게 사장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방송 중에 아이들이 달려와 신기해하며 부스 유리창을 두들겼던 일까지.
그렇게 시장 속에서 시장 사람들과 함께 4년 동안 방송을 진행했다. 첫 방송 준비에만 몇 주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방송할 수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건 시장 상인들 덕분이에요. 남문시장으로 방송국이 통합됐을 때 원래는 시장 상인만 방송을 할 수 있었는데요. 정관에 특별조항을 만들어 제가 계속 DJ를 할 수 있게 해주셨죠. 처음에는 손님으로 왔지만 이제는 저를 ‘시장 사람’이라고 해주세요.”
방송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이 무려 500여 권.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대본을 쓰고 시간 나는 대로 시장을 찾아 상인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정말 좋은 책, 힘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였다. 그 노력은 상인들의 마음에 가닿았고, 4년 동안 방송을 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더 큰 것을 배운 것 같아요. 특히 못골시장 상인들은 시장을 고객과 소통하는 공공성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시는 분들이에요. 그 안에서 작게나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 기뻤죠.”
못골시장 ‘읽어주는 책’ 방송은 이은정 사서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서 2019년 가을, 아쉬움 속에서 막을 내렸다. 이후 책을 좀 더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고, 업무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시장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방송에 대한 갈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은정 사서.
“언젠가는 다시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요. 가락시장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은데요. 상인들 중에는 50년 넘게 장사를 해오신 분들도 계시거든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장의 역사와 상인의 삶을 기록하고 남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 졸업을 먼저 해야겠죠?”
지난 2년여의 시간 동안 팬데믹으로 인해 고통받았을 상인들에게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다들 마음고생이 많으셨어요. 거래량이 많이 줄었으니까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부족하죠. 그럼에도 다들 힘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도움이 돼드리고 싶더라고요. 시장 상인들 모두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책’을 매개체로 시장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즐거움을 선사한 이은정 사서. 방송은 끝이 났지만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건 책 그리고 시장,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책을 사랑하고 시장을 좋아하는 그의 다음 페이지는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지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