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제주를 찾아서베지근연구소, 김진경 소장
시장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삶, 다양한 이야기에 누구보다 진심을 다해 귀 기울인 두 사람을 만났다.
서울에 산다고 제 집 드나들 듯 남산타워에 가는 게 아닌 것처럼, 제주에 산다고 해서 매일 제주 바다를 보며 여행하는 기분으로 사는 것은 아닐 터. 어린시절부터 제주에서 자란 김진경 소장에게 제주는 그저 삶의 터전일 뿐이었다. ‘영주십경(瀛州十景)’을 달달 외우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고, 제주도 문화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회사원과 주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던 그에게 더 큰 관심거리는 ‘떡’이었다.
“제 취미가 떡을 만드는 거였어요. 아토피 때문에 밀가루나 인스턴트 음식을 대신해 떡을 먹기 시작하면서 직접 만들게 되었죠. 나중에는 떡을 이용한 강의도 나가게 됐어요. 외부 강의도 많이 들어오고, 좋아하는 음식이자 취미인 떡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돼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하게 됐죠.”
제주 로컬 푸드를 이용한 프리미엄 전통 떡이라는 아이템으로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다. 당시 시장의 흐름과 사업 아이템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것. 그때 생각해낸 것이 ‘제주 음식’이었다. 제일 잘 알고 친숙한 제주 음식으로 도시락도 만들고 요리 클래스도 열게 됐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즈음, 불현듯 ‘제주 사람들은 왜 이 음식을 먹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좋은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음식에 대한 역사,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풀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음식과 인문학을 결합한 콘텐츠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시장’을 주목했다.
시장 도슨트, 시장을 이야기하다
시장 도슨트라는 직업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제주 동문시장을 기반으로 음식 인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중 국내 1호 시장 도슨트 이희준 씨를 알게 된 것. 동문시장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을까 궁금해 요청을 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동문시장 도슨트 프로그램은 신청 오픈 1시간 만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였다.
“스무 명이 넘는 중년 여성들 앞에서, 이 젊은 총각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제주 토박이인 저보다 제주도와 동문시장에 대해 아는 게 더 많더라고요. 현장 분위기를 리드하면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시장 도슨트라는 직업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됐죠.”
이희준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시장 상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장에 물건 팔러 나오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가게를 지켜온 상인들. 음식의 식재료 하나에도 역사가 있고, 사람들의 인생이 겹겹이 쌓인 시장에 축적된 이야기가 많았다. 김진경 소장이 전통시장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순간이었다.
이후 기존에 진행하던 제주 요리 수업과 시장 탐방을 결합해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시장에서 함께 장을 보며 식재료에 대해 설명해주고, 요리를 만들 땐 요리에 담긴 제주 전통과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제주 향토 음식이지만 일반적인 식당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도의 진짜 집밥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맛도 맛이지만, 음식에 담긴 정성과 이야기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제주 사람이지만 저도 서른 넘어 처음 먹어본 음식이 있어요. 첫아이를 낳았을 때 친정어머니가 메밀로 만든 수제비를 만들어 주셨어요.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이었죠. 메밀을 이용해서 아주 묽게 반죽한 수제비인데, 제주도에서는 산후에 미역국 대신 메밀 수제비를 먹는다는 걸 이때 처음 알게 됐어요. 한 번도 해주지 않다가 제가 첫 출산했을 때 내준 음식이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엄마의 생각과 감정과 정성이 들어 있겠어요. 이렇게 제주 음식에 담긴 숨은 이야기와 제주 문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게 바람이에요.”
시장에 숨겨진 제주의 진짜 이야기
김진경 소장은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것도 ‘시장’이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큰 상설 오일장인 ‘제주시 오일장’을 손꼽았다.
“제주 오일장 내에 ‘할망장’이라고 있어요. 65세가 넘은 할머니들만 모인 곳인데 규모가 정말 커요. 할망장에 가면 제주의 산과 들과 텃밭에서 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어요. 제주의 계절을 정확히 알고 싶으면 이곳, 할망장에 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할망장에서 우미(우뭇가사리), 새우리(부추), 콩개역(볶은콩가루)을 한데 모아 팔고 있으면 ‘우미냉국을 먹는 여름’임을 알 수 있고, 갈치와 늙은 호박이 나와 있으면 ‘갈칫국 먹는 가을이구나’ 알 수 있다고. 늙은 호박이 너무 커 부담스러울 손님을 위해 여러 개로 쪼개어 파는 할머니의 지혜는 덤이다. 재미난 이야기도 많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고.
“제주도에는 ‘동쪽 여자는 서쪽 남자랑 결혼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예로부터 제주 동쪽은 뜬 땅, 서쪽은 된 땅이라고 했대요. 서쪽에서 천 평으로 보리를 수확하면 동쪽에서는 만 평을 농사지어야 같은 양이 나올 만큼 서쪽 땅이 더 비옥하다는 거죠. 그래서 동쪽 여자는 서쪽 남자한테 시집가는 게 최고라는 거예요. 시장 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인데요,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죠.”
살면서 몇 번은 찾아왔을 제주도. 생각해보면 제주도에 와서 현지인과 대화를 해봤거나, 진짜 제주 전통 음식을 먹어본 기억은 없다. 유명 관광지와 유명 맛집을 따라 움직였던 여행에서 새롭게 알게 된 제주의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다. 제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게 전통시장 투어의 매력이라는 김진경 소장. 그러려면 시장과 고객을 이어주는 도슨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중년 이상의 제주 토박이 어머니들을 전통시장 도슨트로 양성하려는 계획이 있어요.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지역 시장에서 켜켜이 쌓아온 추억과 이야깃거리가 많잖아요. 조금만 노력하면 정말 좋은 도슨트가 될 수 있죠. 현재 교육을 받은 어머니들이 오일장 투어를 진행하고 있어요. 앞으로 좀 더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력 양성에 힘을 보태고 싶어요.”
더불어 전통시장 도슨트 앱 개발도 계획하고 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지정된 장소에 가면 알아서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직접 사람이 인솔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제약이 없으니 효율적이다. 언제든 시장을 찾아 식재료에 담긴 이야기와 제주 음식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시장의 안과 밖을 연결하며 누구보다 제주 시장의 가치를 알고 있을 김진경 소장에게 시장은 어떤 공간일까.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걸 시장 상인들은 모두 알고 있어요. 그래서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시장으로 달려가죠. 지역마다, 시장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가 모두 다르거든요. 아직도 알고 싶고, 알아야 될 게 많은 것 같아요. 제주의 삶, 제주의 속살을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장이에요. 진짜 제주를 느끼고 싶다면 꼭 시장에 방문하기를 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