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아트 신
깊고 진한 자연의 품에서 창작을 꽃피운 이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새긴 제주에서 가장 예술적인 장소.
유동룡의 오리지널리티로 채운 건축물
물과 바람, 돌은 제주의 자연을 함축하는 요소다. 그래서 이 섬을 사랑한 예술가에게 제주의 자연은 훌륭한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 일본명 이타미 준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 유동룡은 제주의 자연과 어우러진 인상적인 건축물을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7년 일본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나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그는 평생 귀화를 거부하고 ‘유동룡’이라는 이름을 지켰다.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은 일본 건축가로 활동하기 위해선 일본식 이름이 필요해 가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평생 노력한 그는 말년에 제주라는 땅을 빌려 ‘가장 유동룡다운’ 건축 세계를 구현했다.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水)·풍(風)·석(石) 뮤지엄이 대표작이다.
유동룡의 작품 세계는 흙, 돌, 나무와 같은 자연 소재를 활용해 자연에 녹아드는 건축을 지향한다. 자연을 축으로 주변 경관과 건축을 결합하는 탁월한 감각 덕분에 ‘자연 그 자체가 건축이요, 건축이 곧 자연의 일부’인 양 느껴진다. 포도호텔은 제주의 오름과 초가지붕의 모습을 모티프로 삼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호텔의 조감이 마치 알알의 포도를 연상시킨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계절은 그 자체가 작품이 되어 호텔 곳곳에 내걸린다. 마치 물 위에 뜬 것처럼 보이는 방주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서 착안했다. 물과 빛, 그리고 그림자는 경건한 공간을 더욱 성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제주의 건축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자 유동룡이 지향하는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수·풍·석 뮤지엄이다. 이곳엔 단 한 점의 미술품도 내걸려 있지 않다. 제주의 물과 바람, 돌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공간 그 자체가 작품이다. ‘명상의 공간으로서의 뮤지엄’을 통해 관람객은 제주의 자연에 집중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참고로 관람은 수, 풍, 석 뮤지엄 순서여도 상관없지만, 클라이맥스를 원한다면 석, 풍, 수 뮤지엄 순으로 둘러보길 권한다. 아무래도 두 뮤지엄에 비해 수 뮤지엄의 임팩트가 커 감동이 배가된다. 수 뮤지엄은 물이 지닌 물성에 집중한다. 지붕이 없는 둥근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늘이 고스란히 물 위에 담긴다. 태양의 이동에 따라 물의 반사가 달라지고, 바람이 일으키는 물의 파동이 변화를 만들어낸다. 사방이 콘크리트로 막힌 공간이나 더없이 큰 개방감이 느껴지는,
마치 내면의 마음속에 들어온 듯하다. 풍 뮤지엄은 나무판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는 공간이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소리가 더 잘 들리도록 한쪽은 직선, 반대쪽은 휘어진 곡선 형태로 설계했다. 석 뮤지엄은 제주의 현무암을 테마로 한다. 천장에 뚫린 비스듬한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바닥을 비추는데, 운이 좋으면 바닥에 설치된 돌 위로 정확히 햇살이 들어맞는 광경을 마주하기도 한다. 수·풍·석 뮤지엄의 관람 시간은 오후 1시 30분, 3시 하루 2회로, 100% 사전 예약제다.
2022년 개관한 유동룡미술관(이타미 준 뮤지엄)은 그의 딸 유이화 건축가가 설계해 ‘한국건축가협회 건축상’을 수상한 건축물이다. 1970년대 초기작부터 말년의 제주 프로젝트까지 유동룡이 남긴 건축 작품과 회화, 서예, 조각 등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그의 수집품과 저서도 함께 만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처럼, 유동룡미술관은 ‘Find Your Originality’에 대한 사유의 경험을 제공한다. 관람객은 2층의 전시를 통해 영감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1층에 마련된 티라운지(바람의 노래)와 라이브러리(먹의 공간)에서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향유한다. 유동룡의 서재에서 풍기던 먹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를 모티프로 조향한 시그너처 향기 또한 사유의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다. 유동룡미술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30분 단위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전시 관람 후 티서비스 혹은 기념품 교환 서비스가 제공된다. 근처에 자리한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도 함께 들러보길 추천한다.
수·풍·석 뮤지엄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762번길 79
문의 waterwindstonemuseum.co.kr
유동룡미술관(이타미 준 뮤지엄)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906-10
문의 0507-1385-2678
컬렉터가 주목한 현대미술,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제주국제공항 인근의 탑동은 한때 번화했으나 신제주의 등장으로 사양길로 접어든 제주의 구도심이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던 구도심에 소위 ‘핫플’이 생겨나고, 젊은 세대의 발길이 이어지게 된 데는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가 마중물 역할을 했다. 아라리오 창업주이자 미술품 컬렉터 겸 작가(씨킴·Ci Kim) 김창일 회장은 2014년 폐관 극장을 사들여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한때 영화 필름을 돌리던 영사실과 팝콘을 팔던 매점을 비롯해 극장 특유의 높은 천장과 콘크리트 구조는 ‘보존과 창조’라는 콘셉트에 맞춰 고스란히 현대 미술품 전시 공간으로 다시 재생됐다. 거친 듯 빈티지한 공간의 매력은 컬렉터가 모은 세계적인 작가의 현대미술 작품을 보다 유니크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포인트가 된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에 전시되는 120여 점의 현대 미술품 가운데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작품이 여럿이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키스 해링 ‘무제’, 데미안 허스트 ‘아주 멋진 동심원의 빨강 파랑 뜨겁고 차가운 회화’, 백남준 ‘TV는 키치다’는 개관 때부터 쭉 전시해온 <아라리오 컬렉션> 상설전의 백미다. 이 밖에 압도적인 임팩트를 선사하는 작품도 눈에 띈다. 박제된 동물에 크리스털 구슬을 붙인 고헤이 나와의 ‘픽셀 디어’, ‘픽셀 밤비’ 시리즈, 20m 크기의 배 안에 인도인의 생활 집기를 가득 실은 수보드 굽타의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100마리의 소가죽으로 10m에 달하는 인간의 형상을 직조한 장환의 ‘영웅 No.2’는 잔상이 쉬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미술관 바로 옆 ‘디앤디파트먼트 제주’의 알파벳 d 벽면은 구도심의 시그너처 포토존으로, 전시 관람 후 인증 숏을 남겨봐도 좋겠다.
주소 제주 제주시 탑동로 14
문의 064-720-8201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세계적인 것,
본태박물관
오색실을 곱게 수놓은 침구, 정성을 담아 끼니를 차려냈을 소반과 그릇, 여인의 자태를 뽐내주던 장신구와 의복 등 우리나라 전통 수공예의 정수를 한데 모은 공간이 있다. 2012년 제주도 서귀포에 둥지를 튼 본태박물관이다. 비단 우리의 전통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예술 거장의 작품도 함께 품는다. 먼저 건축물부터 예사롭지 않다. 기하학적 구조의 노출 콘크리트가 돋보이는 박물관은 건축계의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물과 빛, 그리고 노출콘크리트로 구현되는 그의 건축 세계는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을 담은 본태(本態)박물관의 지향성을 함축한다. 최근에는 안도 다다오의 설치미술 작품인 ‘푸른 사과’가 야외 조각공원에 영구 설치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원주의 ‘뮤지엄 산’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청춘’을 상징하는 오브제다.
박물관은 크게 5개의 전시실로 나뉜다. 1관은 조선시대 목공예품인 소반을 비롯해 자수, 보자기, 도자, 장신구 등 옛 전통 공예품의 담박한 미와 멋을 경험할 수 있는 전통 공예관이다. 개방적인 공간감이 느껴지는 2관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백남준, 페르낭 레제 등 거장들의 현대 미술품을 눈에 담고 안도 다다오의 명상실을 관람할 수 있다. 3관은 일본 팝아트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 대표작 ‘무한 거울방-영혼의 반짝임’, ‘호박(Pumpkin)’이 관람객을 반긴다. 4관은 상여, 꼭두와 같은 우리 정통 상례 문화를 보여주고, 5관은 기획전을 선보이는 특별 전시관이다. 현대적인 건축과 한국적인 공예, 그리고 글로벌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만나고 싶다면, 주저 말고 본태박물관으로 향하자.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762번길 69
문의 064-792-8108
유배객의 고독을 형상화한
제주 추사관
시서화에 빼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예술가였던 추사 김정희. 특히 아무렇게나 쓴 듯 보이는 필획 속에 예술적 통찰을 꾹꾹 눌러 담아 완성한 추사체는 서예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필체로 손꼽힌다. 당쟁에 휘말려 초로의 몸을 이끌고 8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제주의 유배객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참담하고 고독한 심정이 제주 추사관에 새겨져 있다. 단순히 추사의 생애와 철학, 작품을 소개하는 박물관이 아닌, 유배객으로서 김정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관람객들이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추사관 건물 그 자체다.
제주 추사관은 삼각형의 박공지붕 같은, 언뜻 볼품없는 감자창고처럼 생겼다. 이는 국내 건축계를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의도였다. 주 전시장은 지하로 규모를 숨기고, 지상에는 단순한 건물 하나만 남겼다. 제주 유배 시절 그렸던 서화 ‘세한도’ 속 풍경을 끄집어내 그를 위한 공간으로 구현했다. 김정희가 59세 때 그린 역작이자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는 둥근 창 하나를 낸 자그마한 집, 노송 하나와 세 그루의 잣나무를 그린 수묵화로,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논어>의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고난과 핍박을 받는 현실 속에서도 인격과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추사의 다짐을 담은 ‘세한도’는 극도의 절제와 간결한 구성을 통해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제주 추사관은 그러한 배경이 담긴 ‘세한도’를 모티프 삼아 추사의 유배 생활의 고독을 관람자들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계단이 가파른데, 지그재그로 계단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은 먼 유배길을 떠나는 추사의 절박한 심정을 상징한다. 추사관 건물 뒤편으로 그가 머물던 당시 가옥이 보존돼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문의 064-710-6865
예술가의 쉼터 겸 아틀리에,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제주시 한경면 중간산에 자리해 오지 마을이던 저지리는 요즘 ‘제주시 뉴저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뉴욕 맨해튼 옆 동네 그 ‘뉴저지’가 맞다. ‘왜?’라는 물음표에는 모호한 답변뿐이지만, 추측하건대 저지오름이나 곶자왈공원, 방림원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어서가 아닐는지 싶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술인의 삶을 제주에 뿌리내리게 한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있다. 2001년 조성된 32만5,100㎡(10만 평) 규모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박서보 화백, 김창열 화백, 현병찬 서예가 등 문화예술 거장들의 작업실이 들어서면서 국내 5번째로 생긴 문화예술인마을이다. 현재도 회화, 서예, 사진, 건축, 조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35명의 예술가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삶과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 양옆으로 갤러리와 작업실이 자리해, 마을을 걷다 예술가가 직접 작품을 소개해주거나 실제 창작활동의 현장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축구장 33개 크기와 맞먹는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을 둘러보려면 선택과 집중,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가 필수다. 이곳에는 꼭 가봐야 할 미술관이, 앞서 소개한 유동룡미술관을 포함해 4곳이나 된다. 먼저 마을 중심부에는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의 이름을 딴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와 제주현대미술관이 자리한다.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는 2007년부터 저지예술인마을에 작업실을 두고 쉼과 작업을 이어오던 박서보 화백의 ‘화가 박서보의 집’ 맞은편에 새로 지은 공간이다. 직선이 아닌 완만한 곡선을 띤 전시실은 모던하고 깊이 있는 건축 디자인으로 그의 작품 세계와 잘 어우러진다. 박서보 화백은 단색의 선을 반복해 긋는 ‘묘법’이라는 독창적 화풍을 통해, 서양의 모노크롬과는 다른 우리나라 단색화의 고유성을 널리 알렸다.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질감, 일정한 간격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들은 마치 수행의 결과물처럼 느껴진다. 현재는 휴관 중으로, 서보문화재단 홈페이지(www.seobo.org)를 통해 전시 일정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제주현대미술관은 참신한 전시와 즐길거리로 ‘기대하지 않은 선물’처럼 반가운 공간이다. 하나의 건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제주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야외 조각 전시장, 김흥수 아틀리에, 문화예술 공공수장고 등 둘러볼수록 즐거움이 증폭된다. 탁 트인 잔디밭에 거대한 박공지붕을 인 문화예술 공공수장고는 몰입형 실감 미디어 아트를 경험할 수 있는 전시관으로, 미술관 본관에서 전시 중인 작품들을 모티프로 한 영상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전시 관람을 위해 본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들을 환대하는 이와 마주한다. 설치미술가 최평곤 작가의 설치미술로, 거인이 허리를 구부려 공손하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마치 반가운 인사처럼 느껴진다. 재미난 포즈로 인증사진을 남길 수밖에 없다. 알차게 구성된 기획 전시실, 특별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나와 고요히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야외 조각공원을 걸어봐도 좋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은 제주를 마음의 안식처로 여긴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의 습작부터 대작에 이르는 작품 세계를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1년 6개월간 제주에 머무른 인연을 바탕으로 그가 대표작 220점을 추려 제주도에 기증해 미술관의 토대가 됐다. 김창열 화백은 1972년부터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해 50년간 오로지 물방울만 그렸는데, 이는 “모든 걸 물방울 안에 녹여 투명한 무(無)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작가는 밝혔다. 그래서 검은 현무암을 연상시키는 미술관은 그의 예술 철학인 ‘회귀’를 모티프로 한자 ‘回(회)’처럼 설계됐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길쭉한 창을 통해 신록의 자연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중정’을 마주한다. 창 앞에 놓인 물방울 모양의 오브제는 빛의 산란을 통해 더욱 투명하고 말갛게 빛난다. 묵직한 공간의 오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서보미술문화공간 제주
주소 제주 제주시 저지14길 23-4
제주현대미술관
주소 제주 제주시 한경면 저지14길 35
문의 064-710-7801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3-5
문의 064-710-4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