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가게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변함없는 모습으로 등불을 밝히는 오래된 가게들.
사이폰 커피의 원조 신촌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원두커피 전문점이다. 1975년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같은 장소에서 49년째 영업 중이다. 신촌 카페 하면 떠오르는 ‘독수리다방’이나 파르페 맛집이었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과는 조금 다르다. 두 카페가 이른바 ‘다방’이라면, 미네르바는 사이폰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원두커피 전문점이었던 것.
이름도 생소한 사이폰은 ‘쉽게 빨아올리는 관’이란 뜻으로 물이 담긴 플라스크를 가열해 생기는 증기의 압력 차를 이용해 커피를 추출한다. 이를테면 핸드드립, 에소프레소, 더치처럼 원두를 내리는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다방이 주를 이루고, 커피 전문 체인점이 전무했던 당시 원두커피 전문점 미네르바의 등장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신촌 명물거리에서 신촌역으로 향하는 골목을 조금만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1975년 모습 그대로인 미네르바의 아늑한 공간이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그너처인 체크무늬 테이블보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신선한 원두커피를 이국적인 방식으로 내려 마신다’는 미네르바의 전통도 그대로다. 지금의 현인선 대표가 2000년 봄, 이곳을 인수해 24년째 미네르바의 맥을 잇고 있다. 특히 사이폰 커피는 ‘눈으로 마시는 커피’로 표현될 만큼 커피 내리는 과정을 직관하는 즐거움이 큰데, 같은 종류의 원두를 2잔 이상 주문하면 손님 테이블에서 바로 커피를 내려준다. 사이폰 커피 외에도 핸드드립, 더치, 에스프레소 등 다양한 메뉴가 준비돼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라면 커피 한 잔도 이야기가 되고, 즐거운 추억이 된다. 미네르바의 모토인 ‘조금은 촌스럽지만, 사랑과 낭만이 넘쳐 흐르는 곳’으로 오래도록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명물길 18 2층
문의 02-3147-1327
문방사우 터줏대감 인사동 구하산방
언제 찾아도 익숙한 풍경이 반가운 인사동. 문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양옆에 펼쳐진 골목마다 옛 정취가 가득하다. 서점, 화랑, 골동품 가게, 한복집, 공예용품점 등 빼곡히 골목을 메운 구경거리를 쫒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좀 더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면 오래된 골목에 숨은 이야기를 따라가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그 시작은 구하산방이 제격이다.
구하산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필방이다. 올해로 110년째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인사동에는 구하산방을 포함해 약 10여 곳의 필방이 있는데, 1980년대만 해도 이곳은 약 40여 개의 필방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문방사우’ 거리였다. 그중 구하산방은 전문 서화 재료를 파는 가게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구하산방의 붓은 뛰어난 품질 덕에 고종과 순종이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게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고순어용(高純御用)’이라고 적힌 커다란 액자. ‘고종과 순종도 즐겨 사용했다’는 뜻으로 서예가 정향 조병호가 구하산방과의 오랜 인연으로 선물한 작품이다. 초창기에는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같은 대가들이 애용했고, 해방 후에는 이응로, 김환기 화백 등이 구하산방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구하산방을 모르면 문인이나 화가가 아니라는 말이 날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수많은 예술가가 드나들었던 구하산방. 단순히 붓을 만들고 파는 것을 넘어 예술적 교류의 장이었고, 또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던 시대의 산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오늘날 구하산방은 초보자가 쓰는 학습용 붓부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급 붓까지 서화 재료 2,000여 점이 마련돼 있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옛 문인과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꼭 한번 방문해보길.
주소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길 11
문의 02-732-9895
특별한 날 행복을 더해주는 청기와 양복점
요즘은 양복도 사이즈를 골라 구매하는 게 흔하지만, 기성복이 없던 시절에는 양복점이나 양장점에 직접 가서 옷을 맞춰 입었다. 졸업과 입학, 결혼식 등 특별한 날을 앞두고 명동 양복점이나 이대 앞 양장점을 찾는 건 하나의 공식과도 같았다. 원단의 종류부터 색깔, 길이, 디자인 등 내 몸에 딱 맞고 내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마법처럼 만들어줘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 즐겨 찾곤 했다.
청기와 양복점은 1973년 문을 열었다. 창업자 황재홍 씨는 14살부터 재봉 일을 시작해 세계양복기술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양복 기술이 뛰어났다. 서른셋의 나이에 단돈 3만원으로 양복점을 열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1970년대 후반에는 가게 직원이 수십 명에 달할 만큼 번창했다. 1990년대, 기성복 브랜드가 나오기 시작하며 사양길로 접어들어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지만 아들 황필승 대표가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에서 힘을 보탰다. 이후 부자가 함께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황필승 대표가 가게를 물려받은 뒤에도 청기와 양복점을 찾는 발길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청기와 양복점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고급 수제 양복만을 고집하지 않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반맞춤 양복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전통 방식의 수제 맞춤옷은 많은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했지만, 기존 공정을 단축해 중저가의 반맞춤 양복을 선보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현재도 청기와 양복점에서는 고급 수제 양복과 반맞춤 양복 모두 구매 가능하다. 또 특수 체형을 위한 양복 제작에 특화돼 있어, 누구든 자신의 체형과 마음에 꼭 맞는 양복을 만들 수 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자리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온 성실함과 옷 입는 사람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섬세함으로 만든 양복 한 벌이 선사하는 행복은 덤이다.
주소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97
문의 02-387-7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