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열매
친숙한 열매가 품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가을 냄새, 은행
단풍이 물들어가는 모습으로 계절을 가늠하는 일은 즐겁지만 어느 순간 거리마다 풍겨오는 악취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길은 마치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열매를 밟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해 다닌 적도 여러 번. 서울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시내 가로수는 총 30만여 그루에 달하는데 은행나무가 10만여 그루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중 암나무인 3만여 그루에서 열매가 열린다. 2021년 기준 서울에서만 연간 총 3만7,700kg의 은행을 수거한다.
코를 찌르는 고약한 은행 냄새는 열매 겉껍질 속에 있는 ‘비오볼’과 ‘은행산’ 때문이다. 곤충으로부터 속살을 보호하는 물질로 껍질이 찢어지면서 점액이 나와 악취를 풍긴다. 실제로 인간 외에 은행을 직접 먹는 동물은 거의 없다. 독성 물질이 있기에 성인 기준 하루 10알, 어린이는 2~3알 미만으로 섭취해야 한다.
치명적인 단점에도 은행나무는 자동차 배기가스 같은 매연과 분진 등 공해에 강하고, 공기 정화 능력이 소나무보다 탁월하다. 나무껍질이 두꺼워 화재와 병충해에도 끄떡없어 가로수로 제격이다. 요즘에는 은행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수확을 하거나 열매 결실 제어제를 투입하는 등 각 지자체마다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가운 냄새가 아니어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노란 은행나무가 없는 가을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공공재산인 가로수가 맺는 열매인 은행을 무단으로 따거나 주워 가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농약, 중금속 또는 매연에 오염됐을 수도 있으니 길에서 주운 은행 열매는 함부로 채취하거나 먹지 않는 것이 좋다.
빌려드립니다, 파인애플
파인애플을 먹고 입천장이 얼얼하거나 혓바닥이 따끔했던 기억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딱딱한 껍질을 잘 벗겨내고 알맹이만 먹었는데도 말이다. 파인애플 속에 함유된 단백질 분해 효소인 ‘브로멜린’이라는 성분이 갑작스럽게 증가하면서 구강 내 얇은 점막을 분해해 입안을 헐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백질을 분해하는 특성을 이용해 고기를 재울 때 파인애플을 갈아서 넣고, 레스토랑에서도 스테이크에 파인애플을 곁들이는 게 다 같은 이유에서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자라던 파인애플은 대항해시대에 유럽에 전해진다. 달고 맛있는 파인애플에 반해 직접 기르기 위해 모종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유럽의 서늘한 기후 조건에서 파인애플은 자랄 수 없었고, 오롯이 산지에서 가져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긴 항해와 더운 날씨 때문에 파인애플은 금방 썩어버렸고 유럽에서 파인애플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아무리 돈이 많은 귀족이어도 파인애플을 쉽게 구경하지 못했으니 자연스레 부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은 의아한 이야기지만 당시 전신 초상화에 파인애플을 들고 그렸을 정도라고 하니 짐작할 만하다. 영국 왕실 소장 컬렉션 중 ‘파인애플을 선물 받은 찰스 2세’(1675~80)라는 그림이 있는데 왕실 정원사로 보이는 이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파인애플을 선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마치 명품 가방처럼 파인애플을 공공장소에 들고 나가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유행하면서 파인애플을 대여해주는 곳도 생겼다. 1년 내내 마트에서 신선한 파인애플을 구매할 수 있고, 간편하고 다디단 통조림으로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다.
신들의 음식, 카카오
촉촉한 케이크, 바삭한 과자,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 등 초콜릿은 어디서나 완벽한 존재감을 뽐낸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열매의 학명은 테오브로마 카카오(Theobroma Cacao). ‘신’을 뜻하는 테오(Theo)와 ‘음식’인 브로마(Broma)의 합성어로 ‘신이 먹는 음식’이라는 의미다. 카카오나무는 남북으로 위도 20도 이내, 해발 300m 아래쪽에서만 자라고 병충해에 약해 기르기 쉽지 않아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귀한 열매를 고대 마야인은 제사를 지낼 때 피 대용으로, 아즈텍 문명에서는 화폐 대신 사용했다. 당시 카카오 10알의 가치는 토끼 한 마리, 100알로는 노예 한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다양한 작물과 문화가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초콜릿의 인기도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초콜릿에 함유된 ‘테오브로민’이라는 성분은 카페인과 비슷한 각성 효과가 있어서 원기를 복돋우는 일종의 ‘약’처럼 여겼고 유럽의 궁정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카카오를 즐기는 이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초콜릿을 사랑한 마니아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전속 약사였던 드보브는 약을 먹기 싫어하는 왕비를 위해 동전 모양의 딱딱한 초콜릿 안에 약을 넣어 바쳤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816년 드보브의 초콜릿 가게는 프랑스 왕실의 유일한 초콜릿 공급 업체로 지정됐고 여전히 현존하며 2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초콜릿이 궁금하다면 프랑스 초콜릿 브랜드 ‘드보브에갈레’를 기억하자.
다산의 상징, 대추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들어가는 것들이 많다. 매일 색이 짙어지는 단풍, 탐스러운 사과 그리고 알알이 열리는 대추가 그렇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굴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을 보면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를 이겨내고 탐스러운 대추가 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추는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소비하는데 일본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열매다. 대추는 예로부터 제사상은 물론 폐백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폐백을 드릴 때 시부모는 활짝 펼친 신부의 치마폭에 대추와 밤을 던져준다. 이는 그 숫자만큼 자식을 낳으라는 의미고, 신부는 받은 밤과 대추를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오롯이 혼자 먹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신부가 시아버지를 뵐 때 공경의 의미를 담아 대추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에는 결혼식이 간소화되어서 폐백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오래전부터 대추는 자손의 번영을 기리는 대상으로 여겼다. 대추는 꽃이 피는 모든 가지마다 열매가 맺히고, 암수가 한 몸인 나무여서 한 그루에서 열매도 많이 열렸기에 다산과 축복의 의미가 담겼다.
참고로 한때 세계적인 부자이자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왕자 만수르가 즐겨 먹는다고 알려진 대추야자는 대추보다 훨씬 달다. 식감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느껴지는데 대추가 아삭하고 퍼석하다면 대추야자는 부드럽고 쫄깃하다. 신기한 점은 대추야자 역시 한 나무에서 열리는 양이 많아 주산지인 중동에서도 다산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