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신세계, 태국 짠타부리
살캉살캉 씹히는 탱글탱글한 과육과 입안을 가득 채우는 새콤달콤 과즙에 배시시 웃음이 난다. ‘그래, 이 맛이야.’ 별천지 방콕을 벗어나 로컬 분위기 폴폴 풍기는 짠타부리에 온 이유 같지 않은 이유다.
방콕의 에카마이 버스터미널을 벗어난 에어컨 버스가 짠타부리(Chanthaburi)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에어컨 바람을 견디길 4시간. 드디어 ‘과일의 땅’에 발을 디뎠다. 짠타부리는 태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열대과일 산지다. 그래서 태국인들은 짠타부리를 ‘태국의 과수원’이라 부른다. 다양한 과일이 비옥한 대지의 기운을 담뿍 먹고 자란다. 우스갯소리로 먹다 뱉은 씨앗마저 쑥쑥 키워낸다고 할 정도로 짠타부리는 최적의 생육 환경을 자랑한다. 특히 두리안의 주산지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쿰쿰하다 못해 다소 역한 두리안 냄새는 짠타부리 여행의 기본값이다. 그래서 두리안 냄새에 점차 무뎌진다는 건 다른 말로 이 도시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맛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사실. 짠타부리가 열대과일의 천국인 건 맞지만, 열대과일에도 ‘제철’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태국을 여행할 때마다 파인애플, 망고, 수박, 망고스틴, 패션프루트 등등 맘 놓고 사치를 부려도 될 만큼 노점에는 싸고 질 좋은 과일이 넘쳐났다. 엄연히 태국에도 계절의 변화가 존재하고, 철에 따라 나고 자라는 과일도 다르다. 태국의 우기는 대략 4~10월인데, 태국의 맛있는 열대과일은 이 시기에 집중된다. 짠타부리 역시 매년 5~6월에 성대한 과일 축제를 벌인다. 거리에선 과일을 형상화한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주렁주렁 과일이 매달린 과수원은 관광객을 위해 빗장을 열고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한다. 과수원 투어는 물론 과일 따기 체험 후 마음껏 시식할 수 있는 과일 뷔페도 인기다. 나무에서 갓 딴 과일은 특유의 신선함은 물론 최상의 맛을 자랑한다. 한입 맛보는 순간 ‘이제 마트에서 파는 과일은 어떻게 먹지’라는 걱정이 앞선다. 과수원의 터줏대감은 역시 두리안이다. 농장에서 먹는 신선한 두리안에선 냄새가 나지 않는다. 뭉근하게 입안을 감싸는 달큰하고 크리미한 식감은 마치 갓 만든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먹는 기분이라고.
두리안과 망고스틴은 각각 과일의 황제, 과일의 여왕으로 불린다. 태국인들은 뜨거운 성질의 두리안을 먹고 난 후 몸을 차게 만드는 망고스틴으로 열을 내린다. 태국어로 망쿳이라 불리는 망고스틴은 우기에만 맛볼 수 있는 한 철 과일이다. 잘 익은 망고스틴은 껍질이 진한 자줏빛을 띠는데 눌렀을 때 껍질이 살짝 들어가며, 향이 진하다. 껍질이 단단하면 십중팔구 상한 것. 끝물에 어렵사리 맛본 망고스틴은 기억 저편의 추억까지 끄집어낼 만큼 달콤 상큼 그 자체다. 방콕의 어느 가판대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망고스틴을 산 적이 있더랬다. 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5,000원 남짓이라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는데, 아뿔싸 개미가 들끓는 게 아닌가. 난감했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조심스레 하나를 꺼내 물에 씻어 까먹어보니, 지금까지 먹어본 망고스틴은 다 가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황홀 그 자체다.
토실토실한 흰 과육을 씹으면 상큼한 즙이 팡팡 터져 나왔다. 그렇게 개미 떼의 습격을 받은 망고스틴을 씻어가며 먹었던 추억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맛있는 망고스틴일수록 개미가 꼬인다고. 망고스틴과 쌍벽을 이루는 태국 최애 과일은 백향과다. 태국어로 싸와롯이라 불리는 패션프루트는 상큼함의 최강자다. 착즙 100%의 패션프루트 주스 한 모금이면 후텁지근한 태국 날씨도 견딜 만하게 느껴진다. 나뭇가지에 포도처럼 매달린 노란색 롱간은 태국어로 람야이라고 불리는데 현지인의 유용한 간식이다. 마치 심심풀이 땅콩을 까먹듯, 람야이 한 묶음을 사서 한 알씩 떼어 먹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껍질이 얇아 손으로 까기도 쉽다. 기분 좋게 퍼지는 은은한 단맛은 한번 맛보면 부지런히 손을 놀리게 할 만큼 매력덩어리다.
레트로 감성 한 움큼
황톳빛 짠타부리 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에 올드타운, 공식적으론 짠타분 워터프런트 커뮤니티가 자리한다. 강을 따라 이어진 수상 가옥들은 짠타부리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낡았으나 어딘가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과 화려한 중국식 사당, 유럽 양식의 주택들이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이어진다. 태국과 베트남, 중국과 프랑스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모양새다. 짠타부리는 과거 프랑스와의 국경 분쟁으로 11년 동안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고, 이때 많은 베트남 이주민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후 바다를 건너온 중국인들이 합세해 오늘날의 짠타부리를 이뤘다.
퍽 이채로운 도시 미관을 보고자 주말마다 태국 현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 남짓한 수카피반 로드(Sukhaphiban Road)는 올드타운의 심장이다. 세월에 빛바래고 허물어진 벽면을 채우는 감각적인 벽화와 아기자기한 매력의 상점이 즐비한 골목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레트로 감성을 물씬 풍긴다. 특히 힙한 분위기의 카페도 많은데, 분쇄한 원두를 망에 넣어 천천히 우려낸 진한 맛의 커피가 이곳의 시그너처다. 강이 내다보이는 탁 트인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노라면, 태국의 여느 대도시나 휴양지에서는 꿈꾸기 힘든 고요하고 나른한 여유가 과일만큼이나 달게 느껴진다.
태양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는 해 질 녘, 대성당을 향해 걸었다. 이곳으로 건너온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1711년 건설된 짠타부리 대성당은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힌다. 올드타운 끝자락, 니라몰 다리를 건너면 붉은 노을에 서서히 침잠해가는 대성당이 눈에 담긴다. 불교 국가에서 만나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라니. 성당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끌 만큼 이채로우나 내부에 자리한 성모마리아상은 더 특별하다. 번쩍이는 보석으로 뒤덮인 1m 남짓한 성모마리아상은 화려하다 못해 눈부시다. 약 2만 캐럿에 달하는 사파이어와 루비, 금, 에메랄드가 촘촘히 수놓아져 있다. 이는 천주교 신자를 중심으로 한 짠타부리 보석 세공업자들이 원석을 기증해 탄생한 작품이다. 짠타부리는 각종 진귀한 원석 산지다.
색을 품은 유색 보석이 주를 이루는데 그중에서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루비 원석의 최초 가공 처리가 짠타부리에서 이뤄진다. 매주 금·토·일요일에는 전 세계 보석 관계자들이 찾아오는 보석 시장이 열리고, 씨 찬 로드(Sri Chan Road)는 보석 거리로 불린다. 단, 여행객의 지갑을 노리는 가짜도 많으니 견물생심은 금물.
면 요리의 성지
짠타부리의 밤은 낮보다 고요하다. 오후 5시를 넘어서면 가게들은 문 닫을 채비를 서두른다. 주말은 그나마 나이트라이프를 기대해봐도 좋다. 센트릭 마켓 플라자(Centric Market Plaza)는 금·토·일요일 오후 4시부터 9시 30분까지 여는 주말 야시장이다. 기념품보다는 먹을거리 위주의 야시장으로,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명소다. 음식 중에 다수를 차지하는 건 역시 면 요리. 태국 전역에서 소비되는 팟타이 면발 대부분이 짠타부리에서 생산된다. 거기다 베트남 이민자들의 쌀국수가 전파되며 이곳의 면 요리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팟타이는 두말할 나위 없고, 각종 해산물로 맛을 낸 쌀국수 옌따포(Yentafo)도 우리네 입맛에 찰떡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짠타부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센찬 팟 뿌(Sen Chan Pad Puu)’는 꼭 맛봐야 한다. 이 지역에서만 나는 가는 면발인 센찬을 볶아 바삭하게 튀긴 게를 곁들인 볶음국수로 자극적인 양념 맛은 맥주를 부른다. 실패 없는 맛집을 찾는다면 찬톤 포차나(Chanthorn Pochana)가 정답이다. 1962년 문을 연 짠타부리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웬만한 태국 요리부터 향토 음식까지 두루 맛볼 수 있다.
열대과일을 배부르게 먹겠다는 포부는 결국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여러 문화가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짠타부리를 발견한 건 기대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그렇게 이곳에 다시 와야 할 이유 하나가 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