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을 향한 진심, 영국 브라이턴
아름다운 해변이 보석처럼 빛나는 런더너들의 휴양지 브라이턴은 채식 식당만 어림잡아 240개가 넘을 만큼, 채식주의자들에게 더없이 다정한 비건에 진심인 도시다.
영국인의 비건 라이프
영국 여행에서 느낀 인상적인 사실 중 하나는 환경보호에 참 열성적이라는 점이다. ‘제로웨이스트’, ‘리사이클링’, ‘비건’은 오늘날 영국인의 일상 속 주요 관심사에 해당한다. 대형 마트는 물론이고 소규모 슈퍼마켓에도 비건 혹은 식물 기반(Plant-based) 상품 코너가 따로 존재하고,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는 손쉽게 비건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영국에서 고기를 전혀 섭취하지 않는 인구 비율은 전체의 14%에 달한다고 한다. 영국인의 51%가 비건이거나 비건을 지향한다는 조사 결과도 의미심장하다.
런던을 비롯해 비건에 가장 친화적인 영국 도시 중 하나가 브라이턴(Brighton)이다. 일절 육류 요리를 제공하지 않는, 순수 베지테리언과 비건만을 위한 식당이 50여 곳에 달한다. 비건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 수까지 합하면 240여 곳이 넘는다. 인구 비율로 따지자면 브라이턴은 런던보다 거주자당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당이 더 많은 도시다.
웰컴 투 브라이턴
이스트서식스주에 위치한 브라이턴은 영국인이 아끼는 도시다. 특히 런던에서 기차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런더너들이 즐겨 찾는다. 브라이턴은 영국에서 해수욕이 유행하던 18세기 중반부터 휴양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짓궂은 날씨로 유명한 영국답지 않게 온화하고 화창한 날씨 역시 휴양지로서의 매력을 더한다. 브라이턴의 볼거리는 크게 4개로 압축된다. 빅토리아 시대 부두에 들어선 테마파크 브라이턴 팰리스 피어(Brighton Palace Pier), 동양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왕실의 휴양 별궁 로열 파빌리온(Royal Pavillion), 쇼핑과 미식의 거리로 불리는 더 레인즈(The Lanes)와 노스 레인(North Laine), 그리고 도시 곳곳에 자리한 비건 레스토랑이다. 브라이턴 여행에서 한 곳이라도 놓칠 수 없는 필수 코스인 셈이다.
브라이턴 팰리스 피어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부터 건재한 도시의 오래된 명소다. 1899년 확장 공사를 통해 지금의 형태를 갖췄는데, 각종 놀이기구와 게임센터, 펍, 레스토랑으로 가득한 테마파크는 언뜻 LA의 샌타모니카 비치를 닮았다. 흥겨운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비릿함을 품은 시원한 바닷바람, 연신 퍼지는 고소한 피시앤칩스 냄새가 이곳의 낭만을 부추긴다. 브라이턴이 휴양지로 이름을 알리는 데 조지 4세의 영향도 컸다. 영국 왕실의 유명 파티광이었던 그는 브라이턴에 아이코닉한 왕실 별장을 세웠다. 웅장한 순백의 로열 파빌리온은 영락없는 인도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더욱 이채롭다. 연회장 천장에 내걸린 연꽃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용 그림으로 장식된 뮤직 룸 등 하나같이 중국풍 인테리어로 채워져 있다. 한마디로 로열 파빌리온은 동양의 영감으로 가득 찬 영국 왕실 별장의 유일무이한 존재다.
로열 파빌리온을 둘러본 여행자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 가득 아기자기한 매력이 넘치는 더 레인즈로 향할 것인지, 스타일리시한 숍과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노스 레인을 먼저 둘러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다.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도시의 옛 터전 위에 요즘 감성 한 스푼이 더해진 더 레인즈는 앤티크 상점을 비롯해 인테리어 숍, 그리고 화려한 보석 상점이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이어진다. 반면 노스 레인은 보헤미안풍의 자유로움이 활기를 더하는 쇼핑 명소로, 주말에는 차량이 통제된 거리에 레스토랑 야외석이 끝도 없이 펼쳐져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더 레인즈와 노스 레인 두 지역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브라이턴의 개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둘러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건강한데 심지어 맛있는 비건 식당
브라이턴은 채식주의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비건 친화 도시다. 세계 최대 비건 식당 찾기 앱인 해피카우(Happy Cow)는 채식주의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도시 중 한 곳으로 브라이턴을 선정했다. 매해 열리는 비건 페스티벌만 봐도 브라이턴이 얼마나 비건에 진심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2003년 시작된 영국의 비건 페스티벌은 2009년 브라이턴에서 첫 행사를 연 후 꾸준히 이 도시의 비건 라이프를 알리고 있다. 올해는 11월 17일 그랜드 호텔 실내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행사에는 채식 요리를 비롯해 비건 식품, 의류와 신발, 화장품과 같은 다양한 비건 아이템을 체험해볼 수 있다. 또한 비건 라이프가 환경과 건강, 동물복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특별 강연, 아트 전시회도 열린다. 페스티벌 참석 티켓은 5유로로, 모금된 기금은 동물 구조단체에 기부된다.
언뜻 채식이라고 하면 싱싱한 채소가 듬뿍 들어간 샐러드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브라이턴의 채식 식당은 그러한 편견을 보기 좋게 깬다. 맛과 비주얼 모두 상상을 초월하는 채식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100% 식물성 피자 전문점 ‘퓨레짜(Purezza)’와 비건 스시 레스토랑 ‘해피 마키(Happy Maki)’는 최근 브라이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핫 플레이스다. 2015년 영국 최초의 비건 피자가게로 문을 연 퓨레짜는 장작불 화덕에 직접 구워 쫄깃한 식감이 일품인 나폴리 피자집이다. 이곳에서는 직접 만든 비건 모차렐라 치즈를 사용하는데, 맛과 질감 면에서 우유로 만드는 모차렐라와 크게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비슷해 비건 피자의 맛과 풍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갓 구운 피자를 포장해 브라이턴 팰리스 피어가 한눈에 담기는 해변에 앉아 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인생 피자라 외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해피 마키의 모든 메뉴는 글루텐 프리, 그리고 생선을 사용하지 않는다. 무분별한 해양 생물 남획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생선을 사용하지 않는 스시 전문점이 탄생한 것이다. 아보카도와 비트, 바질, 두부와 같은 재료를 밥에 싼, 흡사 우리네 김밥과 닮은 스시 부리토가 이곳의 인기 메뉴. 사이드 디시로 기름에 튀긴 콜리플라워를 사테 소스에 찍어 먹는 팝콘 콜리를 주문한다면, 어딘가 2% 부족한 입맛을 완벽하게 채워줄 것이라 확신한다.
브라이턴의 오랜 맛집으로 유명한 ‘떼르 아 떼르(Terre à Terre)’는 전 세계 음식에서 영감을 받은 채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코스로 제공되는 요리는 하나같이 셰프의 섬세한 손길이 더해져 맛과 비주얼 면에서 작품에 가깝다. 비건이 아닌 이들도 고기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건강한 음식 맛에 푹 빠지게 된다. 또한 오가닉 차를 제공하는 애프터눈 티 세트도 즐길 수 있는데, 각각 베지테리언, 비건, 글루텐 프리로 나뉘어 선택의 폭이 넓다. 달달한 디저트를 맛보고 싶을 땐 ‘V360 비건 카페(V360 Vegan Cafe)’가 좋은 대안이 된다. 도시의 유일한 비건 아이스크림 가게로,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똑 닮은 생김새지만 맛은 가벼운 휘핑크림에 가까운 미스터 휘피(Mr. Whippy)는 브라이턴 여행 인증샷 단골 아이템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뿐만 아니라 브라이턴에는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비건 신발 가게도 있다. 노스 레인의 중심 거리인 가드너 스트리트에 위치한 ‘베지테리언 슈즈(Vegeterian Shoes)’는 젖소가 신발을 신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건 신발 가게답게 동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죽이나 스웨이드, 모피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 대신 폴리우레탄과 같은 합성섬유를 활용해 신발을 제작한다. 신발에 사용되는 접착제 역시 동물 콜라겐 성분이 들어가지 않는 제품을 사용한다. 제작 신발 외에도 다양한 비건 신발 브랜드를 직접 신어보고 구매할 수 있어 채식주의자들이 즐겨 찾는다.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골목과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는 휴양지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 게다가 살짝 별난 구석까지. 이 모든 매력이 층층이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브라이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미 가득한 채식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