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생각하는 비거니즘
단순한 채식을 넘어 건강한 환경, 지속 가능한 지구를 생각하는 비거니즘 트렌드에 대하여.
비거니즘의 시작
‘비건’이란 단어는 1944년 영국의 한 잡지에 처음 등장했다. 잡지 <The Vegan News>의 창업자이자 채식운동가 도널드 왓슨이 Vegetarian(채식주의자)의 스펠링 중 앞의 세 글자 ‘Veg’와 뒤의 두 글자 ‘an’을 합해 만든 단어다. 당시에는 ‘유제품을 거부하는 채식주의’라는 뜻이었지만, 1951년부터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보통 채식주의자와 비건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둘은 엄연히 다르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와 과일 등 식물성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채식주의자라면, 비건은 삶의 전반에서 동물에 대한 착취를 거부하는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비거니즘은 동물성 식품은 물론이고 동물로부터 나온 각종 제품과 서비스를 모두 거부하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비건은 단순한 채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물실험을 하는 화장품,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는 가방이나 액세서리 등의 제품 소비도 지양한다.
비건 그리고 비거니즘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비건 인구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유명인이나 소수의 독특한 문화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개인의 건강, 동물복지, 친환경까지 아우르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 비거니즘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식생활을 넘어 라이프스타일로
비거니즘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건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코로나19라는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대혼란의 시기를 겪으며 많은 사람이 건강한 삶과 지구 환경, 나아가 동물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계기다. 단순히 채식을 넘어 ‘친환경적 생활 습관’을 포괄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시선이 옮겨간 것이다.
이러한 비건 문화가 뚜렷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건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가치 소비의 영향도 크다. 가치 소비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만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소비인 ‘미닝아웃(Meaning Out)’, 착한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는 ‘착한 소비’, 친환경적 소비를 지향하는 ‘그린슈머(Greensumer)’ 등이 이에 해당한다. 최근 ‘돈쭐낸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정직한 기업 또는 선한 영향력을 미친 기업의 제품을 구매해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뜻의 신조어다. 제품 하나를 구매하더라도 기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윤리적 행보를 보이는지 따져보는 것. 상품의 질이 좋더라도 인권이나 동물 문제 등이 불거졌다면 절대로 구매하지 않고 반대로 기업이 지향하는 이념이 나의 신념 또는 가치관과 맞으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른바 ‘윤리적 소비’ 형태로 가치 소비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비거노믹스, 식지 않는 열풍
비거니즘이 가져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며 비거노믹스 시대를 열었다. ‘비거노믹스(Veganomics)’란 비건(Vegan)과 경제(Economics)를 합해 만든 신조어다. 비건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경제란 뜻으로 넓게는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친환경적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산업 전반을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비거노믹스 시장은 대체육을 포함한 식품 분야였지만, 최근에는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는 중. 동물성 원료를 배제하고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화장품, 모피나 가죽 대신 친환경·재활용 소재를 사용한 의류, 에너지 효율과 탄소배출량을 고려한 친환경 자동차를 예로 들 수 있다.
명품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에르메스는 미국 친환경 스타트업 마이코웍스의 기술을 활용해 ‘실바니아’로 만든 가방을 출시했다. 실바니아는 버섯 뿌리 부분의 균사체를 통해 만든 인조가죽이다. 루이 비통의 ‘찰리 스니커즈’는 천연 바이오 소재와 리사이클 재료를 결합해 제작됐고, 밑창, 안감, 신발 끈에도 100% 재활용 가능한 소재를 적용해 눈길을 끌었다. 구찌는 자체 연구를 통해 식물성 원료 기반의 비건 레더 ‘데메트라(Demetra)’를 개발했다. 이 밖에도 샤넬, 버버리, 베르사체, 톰 포드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가 앞다퉈 퍼프리(Fur Free)를 선언하는 등 패션업계에는 일찌감치 비건 트렌드가 자리 잡았다.
일상에서도 ‘비건’이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반 식당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비건 메뉴가 따로 준비돼 있고, 비건 전문 식당도 크게 늘었다. 식품, 패션, 생활용품 등 비건 인증마크가 새겨진 제품이 즐비하고, 처음부터 비건을 내세우며 론칭한 브랜드도 다수. 비건 제품만 모아서 판매하는 편집매장도 들어섰다.
비거니즘은 잠깐 주목받고 사라지는 이슈 또는 유행을 넘어섰다. 단순한 식습관에서 시작해 우리의 생활, 건강, 환경, 동물, 지속 가능한 지구까지 긴밀하게 연결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자리 잡은 것. 친환경적 삶을 추구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비거니즘 열풍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