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샘이 흐르는 카를로비바리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사로운 일상과 근심을 툴툴 털어내고 싶을 때, 기왕이면 낭만적인 무드의 도시이길 바란다면, 체코의 카를로비바리만 한 데가 없다.
치료와 치유.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단어다. 치료가 병을 낫게 한다는 의미라면, 치유는 심리적 안정을 회복하는 상태를 뜻한다.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말은 있어도 ‘몸과 마음을 치료한다’는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 닮은 듯 다른 두 단어가 마치 하나의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도시가 있다. 체코 프라하에서 차로 2시간 남짓 떨어진 웨스트 보헤미아 지방에 자리한 카를로비바리(Karlovy Vary)다. 이곳은 수 세기에 걸쳐 유럽 부호들이 치료와 치유를 위해 찾은 온천 휴양지다. 그리고 여전히 그 명성은 유효하다. 카를로비바리가 스파 타운으로 이름을 떨친 결정적 계기는 보헤미아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4세 덕분이다. 이곳의 온천수를 마신 카를 4세의 다리가 말끔히 나았다는 소문과 함께 카를로비바리는 14세기 유럽인에게 일약 ‘치유의 도시’로 떠올랐다.
전설의 시작
카를로비바리의 특별함, 즉 물의 치유력을 입증한 첫 환자는 카를 4세다. 사연은 이렇다. 카를 4세가 자신이 쏜 화살에 맞고 도망치는 사슴을 쫓던 중 물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치료하는 사슴을 보게 된다(부상 입은 사냥개가 물에 빠진 후 증세가 호전됐다는 설도 있다). 상처가 치료되는 걸 본 황제는 뜨끈하고 묘한 피비린내 나는 물이 궁금했다. 이후 아픈 다리를 끌고 이곳을 다시 찾은 카를 4세는 그 물을 마신 후 병세가 호전됐다. 온천수의 약효를 경험한 황제의 명으로 카를로비바리는 온천 도시로 번성한다. 카를 왕의 카를로비(Karlovy)와 온천을 뜻하는 바리(Vary)를 합쳐 ‘카를의 목욕탕’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황제의 병을 낫게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유럽의 내로라하는 귀족과 저명인사들은 앞다퉈 카를로비바리를 찾았다. 러시아의 개혁 군주 표트르대제는 물론 베토벤, 모차르트, 드보르자크, 톨스토이, 괴테, 카를 마르크스 등이 치료차 이곳에 머물렀다. 기록에 따르면 14~15세기 이곳을 찾은 귀족들은 하루에 14시간씩 온천욕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야 몸 안의 병이 피부 밖으로 나올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다. 그리고 16세기부터 매 식사 시간 전 온천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과연 카를 4세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경험한 온천수의 약효는 진짜였을까? 그 비밀은 현대에 이르러서야 입증됐다. 카를로비바리의 온천수는 30여 종의 광물이 포함돼 있어 미네랄이 풍부하다. 다양한 미네랄 성분은 면역력 강화, 심신의 에너지 회복뿐만 아니라 류머티즘과 관절염, 소화기나 호흡기 질환, 당뇨와 성인병 예방에 효과적이다. 덕분에 이곳의 호텔과 스파 하우스는 저마다 전문가의 처방에 따라 온천수를 활용한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스파 트리트먼트를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카를로비바리로 끌어당긴다.
약 대신 온천수 한 잔
우리네 옛 어른들이 몸에 좋은 약수를 뜨기 위해 부지런히 약수터에 올랐듯, 카를로비바리를 찾는 여행객들은 온천수를 마시기 위해 콜로나다(Kolonáda)를 누빈다. 도심 한복판 온천수를 마실 수 있는 5개의 콜로나다가 인접해 있는데, 물 온도와 성분, 맛은 물론 효능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이곳 의사들은 환자의 몸 상태에 따라 몇 번째 콜로나다의 온천수를 마시라는 처방을 내린다고. 사실 온천수를 ‘약수’라 칭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닌 게, 빗물이 용암 지반을 거쳐 다시 온천수로 솟아오르기까지 천 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그 정도 세월을 거친 물이라면 영험한 기운이 서렸다고 해도 묘하게 수긍이 간다. 몸에 좋다면 뭐든 먹고 보는 것이 인간의 욕심인지라, 누구나 ‘공짜’로 온천수를 마실 수 있는 카를로비바리에서는 밥보다 ‘물배’ 채우기 십상이다. 물론 너무 많이 마시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철분 성분이 치아를 누렇게 변색시킬 수도 있어 하루 1.2L를 넘기지 않는 게 좋다.
카를로비바리에서는 하루 종일 물만 마시고 다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과정일 뿐. 이곳의 온천수를 마시기 위해선 전용 컵이 필수다. 주전자처럼 긴 주둥이가 달린 라젠스키 포하레크(Lázefsky Poharek)는 손잡이가 빨대 역할을 하는 도자기 컵이다. 이 컵에 마셔야 온천수의 피비린내 나는 맛이 덜하다. 모양과 디자인도 다채로워 기념품으로서의 소장 가치도 충분하다. 5개의 콜로나다는 저마다 지붕이 덮인 통로 형식의 주랑(Colonnade)으로 멋스럽게 꾸며져 있다. 각각 온천수가 퐁퐁 샘솟는 2~5개의 샘터가 자리한다. 도심 최고의 명소 중 하나인 믈린스카 콜로나다(Mlýnská Kolonáda/Mill Colonnade)는 100개 이상의 늘씬한 열주가 늘어선 웅장한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건축물이다. 5개의 콜로나다 중 가장 큰 규모로, 130m에 달하는 건물 중간중간 5개의 터에서 온천수가 솟는다.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거리에 하얀 아치 장식이 돋보이는 트르주니 콜로나다(Tržní Kolonáda/Market Colonnade)가 서 있다.
카를로비바리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수 터로, 카를 4세가 아픈 발을 고치기 위해 들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리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현대적 건물의 브르지델니 콜로나다(Vřídelní Kolonáda/Hot Spring Colonnade)는 70℃가 넘는 온천수가 하늘로 치솟는 간헐천과 5개의 분수를 볼 수 있다. 온천수의 생성 과정을 생생히 엿볼 수 있는 지하 뮤지엄도 흥미로운 볼거리 중 하나다. 드보르자크 공원 내 위치한 우아한 분위기의 사도바 콜로나다(Sadová Kolonáda/Park Colonnade)는 30℃ 남짓의 미지근한 온천수를 마실 수 있고, 자메츠카 콜로나다(Zámecká Kolonáda/Castle Colonnade)는 스파 이용객에게만 허락된다.
온천을 누릴 최적의 계절
테플라(Teplá) 강을 따라 우아하게 도열한 벨에포크,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은 콧대 높던 옛 영광을 간직한 채 건재하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파 타운이라는 명성 또한 여전히 진행형이다. 특히 온 도시가 크리스마스 조명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한겨울은 황홀함의 절정이다. 마치 고요한 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왕국을 보는 듯하다. 스파 호텔 서멀(Spa Hotel Thermal)의 거대한 트리가 불을 밝히면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돌입하며, 믈린스카 콜로나다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멀드 와인의 체코 버전 격인 따뜻한 스바르자크(Svářák)와 ‘굴뚝빵’으로 유명한 트르델니크(Trdelník), 바삭한 식감의 전통 과자 오플라트키(Oplatky)는 겨울 추위를 녹여줄 마켓 간식 3대장이다.
크리스마스의 낭만으로 물드는 카를로비바리의 겨울은 온천욕을 즐길 최적의 타이밍이기도 하다. 날이 추울수록,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며 느끼는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니. 과거 귀족들만이 누리던 호사는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행복이 됐다. 호텔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온천욕부터 마사지, 사우나 등 다양한 스파 테라피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임페리얼 호텔(Spa Hotel Imperial)과 그랜드호텔 펍(Grandhotel Pupp), 칼스배드 플라자 메디컬 스파 & 웰니스 호텔(Carlsbad Plaza Medical Spa & Wellness Hotel)이 대표적이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임페리얼 호텔과 1701년에 건축된 그랜드호텔 펍은 도시를 대표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랜드마크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물론 황제의 휴식에 버금가는 스파 테라피를 제공한다. 칼스배드 플라자 메디컬 스파 & 웰니스 호텔은 휴식보다 휴양에 방점이 찍힌다. 전문 의료진의 처방에 따라 250여 가지의 트리트먼트를 이용할 수 있는 메디컬 스파 센터는 이곳을 방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
저마다의 목적과 이유를 품은 사람들이 카를로비바리로 모여든다. 누군가는 고풍스러운 도시 미관에, 또 다른 이는 식도를 뜨겁게 적시는 전통주 베헤로프카(Becherovka)에 반할지 모른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 하나의 사실은 이곳을 떠날 땐 미세하게나마 몸과 마음의 근육이 전보다 탄탄해지리라는 것이다. 달력의 끝과 시작, 카를로비바리가 더 그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