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위대한 탄생을 기리며
세기의 클래식 거장들의 삶과 음악이 여전히 반짝이는 도시, 빈(Wien). 특히 올해는 오스트리아 국민 음악가로 칭송받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유려하고 경쾌한 왈츠 선율이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질 예정이다.

왈츠의 도시
빈의 정체성은 예술로 집약된다. 예술사에 내로라하는 대가 가운데 빈과 인연을 맺지 않은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음악가 역시 마찬가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와 같은 클래식 거장에게 빈은 영감의 원천이자 삶 그 자체였다. 세계적인 명성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 국민의 사랑과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음악가는 따로 있다. 바로 ‘왈츠의 왕’으로 불린 요한 슈트라우스 2세다. 19세기 빈은 왈츠의 도시였다. ‘쿵짝짝 쿵짝짝’ 3/4박자의 리듬을 가진 왈츠는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이 매력적인 춤으로 빈 파티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오늘날에도 450개 이상의 무도회가 고요한 빈의 겨울밤을 왈츠로 물들인다.
초창기 왈츠는 춤이 주연, 음악은 조연에 불과했다. 우아한 춤을 추기 위한 배경음악에 지나지 않던 왈츠의 위상을 드높인 이들이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다. 왈츠의 대중화를 이끈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 이어 그의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빈 클래식 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입지전적 인물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황제 왈츠’, ‘봄의 소리’, 오페레타 <박쥐> 등 왈츠를 춤곡 이상의 반열로 격상시켰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곡으로 사랑받으며, 매해 1월 1일 진행되는 빈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의 공식 피날레곡으로 유명하다. 경쾌하고 감미로운 왈츠 특유의 리듬감이 새해 희망과 더없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는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되는 절망적 상황의 배경음악으로 이 곡이 쓰여 공포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오스트리아에서 존재 자체가 왈츠이자 빈으로 상징된다. 그의 사망 당시 빈 인구의 20분의 1에 달하는 10만 명의 인파가 장례 행렬을 따랐을 정도다. 그리고 여전히 그를 향한 국민의 애정과 존경은 변함없다. 올해는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공연과 행사가 1년 내내 빈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클래식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과 열망을 품은 애호가라면, 이번 기회가 더없이 완벽한 타이밍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걷고 또 걸을 각오
오로지 쉬겠다는 필사의 다짐을 하지 않고서야 여행자는 바쁘다. 여행 장소가 빈이라면 더더욱 쉴 틈 없다. 눈만 돌려도 미술관과 궁전, 성당과 같은 세월의 오라를 잔뜩 머금은 관광지가 모래알처럼 흩뿌려져 있다.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의 패권을 틀어쥐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찬란한 유산은 도시의 미학을 한껏 드높인다. 빈 중심부는 원형으로 이뤄진 도로, 링슈트라세(Ringstrasse)를 따라 굵직굵직한 명소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시청사를 필두로 국회의사당, 호프부르크(Hofburg),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슈테판 대성당,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반나절만 걸어도 두루 훑어볼 수 있다. 물론 자전거를 빌리거나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링 트램을 타면 여행은 한결 수월하다.


최적의 루트를 따라 링슈트라세 관광지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황실의 공식 거처이자 정부 청사로 사용된 호프부르크는 말간 하늘을 배경으로 에메랄드색 돔을 얹은 건축물이 더없이 청량하게 빛난다. 우아한 건축물 자체도 멋스럽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예술을 향한 애정과 집념이 엿보이는 소장품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크다. 빈 미술사 박물관은 고대 이집트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5,0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럽 예술의 정수를 오롯이 품고 있다. 찬찬히 훑어보다가는 반나절로는 어림없을 방대한 양이다. 반면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은 1900년대 오스트리아가 낳은 천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중심으로 모더니즘 예술가의 현대 미술품으로 가득하다. 특히 에곤 실레의 열렬한 팬이라면 레오폴트 미술관은 방문 1순위다. 익히 들어봤던 예술가의 작품을 실제로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인지 관람 내내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혹,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가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세계 최대 규모의 클림트 컬렉션을 보유한 벨베데레 궁전에 가면 진품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와 사랑에 빠질 시간
빈에서의 둘째 날, 슈테판 대성당 위로 내리쬐는 청량한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빈 시립공원(Stadtpark)을 걸었다. 고요한 공원의 아침은 더없이 다정하고 무해한 세상이다. 보고 있자면 덩달아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할 만큼 생기로 가득하다. 공원 곳곳에는 기념비와 장식품이 서 있는데, 그중 바이올린을 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상이 단연 돋보인다. 황금상 주변 정성스레 가꾼 화단만 보더라도 그를 향한 빈 시민의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듯하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톺아보는 여정의 시작점으로 빈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곳이 요한 슈트라우스 뮤지엄-몰입형 박물관(Johann Strauss Museum-New Dimensions)이다. 고아한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 안에는 최첨단 방법으로 그의 음악 세계와 조우한다. 박물관에 입장하는 관람객 손에는 하나같이 GPS 추적 기능을 갖춘 헤드폰이 들려 있다. 이를 쓰고 800m² 규모의 전시실을 찬찬히 둘러보며 그의 생애를 담은 영상과 음악을 감상하는 식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과거의 예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접근 방식이 꽤 이채롭다. 주마간산식이 아닌 음악 하나하나에 집중해 온몸으로 만끽하며 관람하다 보면 예술적 황홀감으로 충만해진다.
그의 후손이 직접 운영하는 하우스 오브 슈트라우스(House of Strauss)는 빈 황금시대를 이끈 슈트라우스 가문의 영광을 고스란히 재현한 공간이다. 왈츠 음악의 선각자 격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37년 카지노 최게르니츠를 세워 왈츠를 통한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사후 그의 아들이 이 공간을 이어받아 무도회와 클래식 콘서트를 열며 빈의 핫 플레이스로 등극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슈트라우스 가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화려한 천장 프레스코화와 크리스털 샹들리에 장식이 돋보이는 슈트라우스 홀은 과거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직접 무대에서 연주하던 역사적인 장소다. 오늘날에는 그의 연주곡에 맞춰 환상적인 라이트 쇼를 선보이는 공간으로 사랑받는다.


빛나는 천재성으로 수많은 왈츠 음악을 작곡하고 사교의 정점인 무도회를 개최했으나 정작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자신은 왈츠를 잘 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평범하면서도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 있는데,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요한 슈트라우스 아파트먼트(Johann Strauss Apartment)다. 1863년부터 1870년대 초반까지 이곳에 살면서 대표작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세월을 멋스럽게 덧입은 나무 바닥과 대리석 공간은 그가 직접 연주하던 피아노, 바이올린을 비롯해 당시의 일상을 재현한 가구와 의상 그리고 무수히 나열된 초상화가 클래식 애호가의 발길을 붙든다.
매일 밤 훌륭한 공연장에서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을 라이브로 즐기는 일은 빈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황홀한 경험 중 하나다. 클래식 애호가의 버킷 리스트로 손꼽히는 빈 국립오페라극장(Wiener Staatsoper)과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 안 데어 빈 극장(Theater an der Wien)은 빈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콘서트홀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귀 호강을 누릴 수 있다. 소박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클래식 공연 역시 감동의 파장이 크다. 쇤브룬 궁전의 오랑제리(Orangerie) 여왕이 대표적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었던 쇤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애정하던 공간으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이곳의 오랑제리는 소박한 규모의 콘서트홀로, 과거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를 펼치던 역사적인 무대다. 이곳에서 감상하는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그 어느 곳보다 생생하고 현장감 넘친다. 연주되는 곡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대부분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이 각각 4곡씩 연주되며, 중간중간 짧은 음악극 형식의 오페레타 공연이 곁들여진다. 저녁 8시 30분에 시작되는 공연에 앞서 1시간 남짓 프라이빗하게 쇤브룬 궁전을 둘러보는 투어도 이색적이다. 소란한 낮과는 또 다른 고요한 궁전의 밤을 엿볼 수 있어 더없이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볕 잘 드는 광장과 거리마다 빼곡하게 늘어선 노천카페는 빈에서 가장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시간을 보장한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일상을 구경하는 것만도 꽤 근사한 여유다. 여기에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아인슈페너 한 잔 혹은 빈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풋풋한 화이트 와인 한 모금을 곁들이면 온 세상이 쿵짝짝 쿵짝짝 리듬에 맞춰 왈츠를 추는 것 같다. 봄기운으로 가득한 빈은 끝없는 낭만과 행복을 부추기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