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마침표, 모로코 페즈
비좁은 골목 양옆으로 높이 쌓아 올린 흙담 때문인지 미로에 갇힌 기분이다. ‘대체 여긴 어디’라는 물음표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지만, 걷는 거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길을 잃어야 비로소 새로운 길을 마주할 수 있는 거라고, 페즈의 올드시티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관문, 모로코. 스페인과 고작 14km 떨어져 있지만 엄연히 북아프리카에 속한 나라다. 그래서 흔히 ‘몸은 아프리카에, 머리는 아랍에, 눈은 유럽에’ 있다고들 말한다. 아프리카 대륙에 관한 편견도 깨부순다. 푸르른 대서양과 붉은 사하라사막, 초목의 산세를 품은 아틀라스산맥까지 매력적인 천의 얼굴을 지녔다. 동양의 뉴욕이라 칭할 만큼 다채로운 스타일로 무장한 카사블랑카, 천년의 숨결을 품은 마라케시, 온통 푸른빛으로 빛나는 셰프샤우엔,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미로 도시 페즈까지, 하나같이 주옥같은 도시들이다. 그중에서도 페즈는 가장 모로코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9,000개에 달하는 골목 구석구석 모로코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촘촘히 얽히고설켜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인다.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기꺼이 길을 잃고 헤매기 위해, 여행자들은 오늘도 페즈 메디나(올드시티)로 모여든다.
어디로 가야 하죠?
섬세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결정체인 페즈 공항은 낯선 이국땅에 도착했음을 실감케 한다. ‘모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이미지 때문에 고루할 거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갈 만큼 모던하다. 공항에서 페즈 메디나의 대문 격인 블루 게이트(현지에서는 밥 부즐루드라고 말해야 알아듣는다)까지는 택시를 이용하면 일사천리다. 물론, 흥정부터 성사돼야 한다. 버젓이 여행자를 위한 택시 요금이 안내돼 있지만 어디까지나 여행자 사정일 뿐. 택시 기사는 태연히 웃돈을 얹은 가격을 부른다. 적당히 속는 셈치고 눈치껏 흥정하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참고로 모로코에서 물건을 구입할 땐 호객꾼이나 상인이 제시하는 금액의 최소 절반은 깎고 시작해야 한다. 애초부터 ‘그 가격은 말도 안 돼’라는 느낌으로 난색을 보이면 그때부터 가격이 뚝뚝 떨어진다. 100디르함이 10디르함이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페즈는 크게 메디나라고 불리는 올드시티와 외곽의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여행의 9할은 흙빛 성곽으로 둘러싸인 메디나에 집중된다. 페즈 메디나는 북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큰 올드시티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뻗은 골목의 전체 길이만 100km에 달한다. 성인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 꽉 찰 만큼 거리는 매우 비좁다. 당연히 차는 통행할 수 없다. 복잡함의 끝판왕 격으로 도시를 건설한 배경은 ‘생존’ 때문이다. 외적의 침략을 대비하는 한편 햇빛, 모래바람과 같은 극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메디나가 시작되는 장소답게, 블루 게이트는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까닭에 블루 게이트 바깥쪽은 여행객을 태우려는 택시 기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안쪽은 호객에 열을 올리는 상인들로 시끌벅적하다. 블루 게이트는 안쪽은 초록색, 바깥쪽은 파란색 문양이 그려져 있다. 각각 이슬람과 외부 신문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문을 지나는 순간 스마트폰 지도 앱도 무용지물로 전락하는 미로 속에 들어서게 된다. 심호흡 한번 크게 내쉬고 안으로 진입하자 눈앞에 큰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알라딘의 세상 속으로
우선 숙소부터 찾아야 했다. 초행길임을 알아차렸는지 몇몇 사람들이 길을 알려주겠다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이럴 땐 줄행랑이 최선이다. 미리 약도를 저장해둔 터라 수월하게 호텔에 도착했다. 허름한 외관에 불안했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부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오색찬란 별천지다. 모로코에서는 전통 가옥을 숙소로 개조한 리아드 호텔이 여럿이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마치 아라비아 저택에 초대된 듯한 기분이 든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화려한 색감의 타일과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도배하다시피 장식돼 있고, 싱그러운 식물 정원과 스페인식 중정처럼 1층부터 천장까지 뻥 뚫려 있는 높은 층고의 로비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아, 호캉스 맛집을 페즈 메디나에서 찾을 줄이야. 아름다운 공간 덕분인지 입에 잘맞지 않던 모로코 음식도 맛있게 느껴진다. 고기와 채소를 뭉근히 익혀낸 ‘타진’과 고소하고 쫀득한 빵 ‘훕즈’, 여기에 신선한 모로칸 샐러드와 부드러운 모로코식 라테 ‘누스누스’ 한잔은 그야말로 환상의 꿀조합이다.
길을 잃어버릴 만반의 마음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걷되 인적 드문 외진 길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모로코의 치안은 좋은 편에 속하지만, 돌발 변수는 늘 생길 수 있다. 도움을 주려는 선한 이들도 많지만, 이유 없이 접근해 수작을 걸거나 가이드를 자처하며 팁을 요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선 블루 게이트 인근에서 본격적인 방황을 시작했다. 한 손엔 순도 100%의 달콤 신선한 노점표 오렌지 주스를 들고서 말이다. 블루 게이트를 등지고 왼쪽 도로를 따라 걸으면 페즈 재래시장이 반긴다. 현지인의 식탁에 올라갈 각종 신선한 채소와 과일, 이름도 알 수 없는 묘한 향내를 풍기는 향신료, 아라베스크 문양이 가득 그려진 식기까지 볼거리 천국이다. 여행객을 위한 가죽 제품과 수공예품 상점도 셀 수 없다. 관심 있게 구경할라치면 어김없이 호객꾼의 끈질긴 구애가 시작되니, 요령껏 구경하고 쓱 빠지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특히 현지인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의도 요구된다.
직접 걸어본 골목은 ‘낭만’이라는 단어보단 ‘리얼리티’에 가깝다. 잘 꾸며진 관광지가 아닌 실제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다. 메디나에는 약 15만 명이 밀집해 살아간다. 온갖 생필품 상점부터 시장과 학교, 일터가 모두 골목 안에 모여 있다. 누군가에겐 메디나의 골목이 세상의 전부이자 자신만의 소우주일 것이다.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 반복되는 삶의 반경은 늘 고만고만하기에 그곳이 내 세상의 전부일 거라 착각한다. 그럴 때 여행이 좋은 치유제다. 일상의 궤도를 잠시 이탈해봐야 내 안에 새로운 길을 내고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복잡한 미로 도시 한복판을 헤맬수록 어쩐지 내가 가야 할 길은 점점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분투하는 삶은 아름답다
휙휙 눈이 돌아가는 풍경에 정신이 팔려 메디나 여행의 필수 코스를 놓칠 뻔했다.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 방식 그대로 가죽을 염색하는 작업장, 테너리(Tannery)다. 색색의 염료가 담긴 작업장은 마치 그림물감을 짜놓은 팔레트를 연상시킨다. 그 풍경이 굉장히 이채로워 모로코 여행 다큐멘터리나 페즈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자주 등장한다. 야외에 위치한 테너리를 구경하는 방법은 그 주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건물 테라스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것이다. 대략 오후 5시가 넘으면 작업자들이 일을 마쳐 테너리는 휑하다. 작업 공정을 관람하고 싶다면 늦지 않게 서둘러야 한다. 메디나에 위치한 총 3개의 테너리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은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초우아라(Chouara)다.
눈으로는 테너리가 보이지 않음에도 코가 반응하기 시작한다. 코를 찌르는 악취의 출처가 바로 테너리다. 가죽 염색 공정을 살펴보면 지독한 냄새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장인이 직접 벗겨낸 가죽은 뿌연 석회 물에 담가 숙성 과정을 거친다. 천연 염색 원료가 잘 스며들게 하기 위한 첫 공정이다. 이때 가축의 배설물을 이용하는데, 비둘기 똥이나 소의 오줌, 재와 같은 것들이다. 당연히 심한 악취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비위가 약한 이들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그럴 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민트 잎! 화한 민트 잎을 코에 대면 그럭저럭 견딜 만해진다. 민트 잎은 테너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뷰 포인트를 제공하는 가죽 상점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테너리 감상 후 자연스럽게 쇼핑을 유도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가까스로 도착한 옥상 테라스에서 바라본 테너리는 ‘분투’ 그 자체다. 알록달록 염료를 푼 통에 몸을 담근 채 구슬땀을 흘리는 작업자들은 장화를 신은 것 말고는 별다른 장비도 없다. 천년 전의 작업자들이 그랬듯, 묵묵히 가죽을 발로 밟고 손을 놀리기 바쁘다.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그저 부지런히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자신의 소중한 일터를 눈요깃거리로 삼는 여행자들이 불편하진 않을까’ 괜한 노파심이 들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메디나만 둘러보긴 아쉬워 택시를 타고 신시가지로 나오니 뭔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좁은 골목에서 벗어난 해방감이랄까. 기념사진을 남길 요량으로 페즈 왕궁을 찾았다. 엄밀히 따지면 왕궁이라 쓰고 정문이라 읽어야 맞다. 내부 입장이 불가하고 오로지 정문만 감상할 수 있어서다. 왕조의 위세를 보여주듯 정문은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색 지붕과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 그리고 번쩍거리는 황금빛 대문의 미감이 돋보인다. 하지만 감흥은 딱 거기까지. 페즈를 추억할 단 하나의 이미지를 고르라면, 붉은 흙 담벼락을 높이 쌓아 올린 비좁은 메디나 골목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