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길,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곳
모든 것이 변화하는 순간에도 그 자리를 지켜온 골목.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며 오늘도 계속되는 골목 이야기를 좇아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할 때마다 가장 먼저 했던 건 주변 골목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가까운 버스 정류장은 어디에 있는지, 주변 편의시설과 마트, 세탁소, 빨래방 등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나름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복잡해 보였던 골목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더 이상 휴대폰 지도 앱을 보지 않고도 골목을 누비며 원하는 곳에 닿았을 때 느꼈던 묘한 쾌감이란!
반대로 낯설기에 더욱 매력적인 순간도 있다. 현지 골목 탐방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특별한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다 보면 간혹 헤매기도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마주할 때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마치 여행지의 민낯을 본 느낌이랄까. 골목 한 바퀴 돌고 나면 사람들이 주로 뭘 먹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그들의 일상이 주는 소소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좁은 골목에서 길을 잃고 몇 바퀴를 빙빙 돌기도 하고, 막다른 길에서 되돌아올 때도 있지만, 이 또한 골목 여행이 주는 즐거움일 터. 처음 가본 골목에서 무작정 헤매다가도 이내 아는 길이 나오면 반갑기 그지없다. 여러 갈래의 길 중 가장 빠른 길은 있어도 정답은 없기에 길을 찾아가며 배우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도 닮은 듯하다. 길을 잃었다고 조급해할 필요 없다. 모든 길은 이어져 있고, 조금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골목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오래된 골목이 품은 삶의 온도
교과서에 철수와 영희 그리고 바둑이가 등장하던 시절, 당시 아이들은 골목에서 태어나 골목에서 자랐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골목이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처럼, 당시 집 앞 골목은 마당이었고, 놀이터였고, 운동장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여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덕에 골목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비단 아이들뿐일까. 어른들에게도 골목은 유희의 장소이자 사랑방 같은 존재였다. 골목 평상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곤 하는데, 집안 경조사부터 오늘 아침 반찬까지 숨김이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저 없이 도움의 손길을 보탰던 정다운 골목 풍경. 옆집 수저 개수까지 알던 시절, 한 골목 안에 산다는 건 이웃을 넘어 가족 그 이상을 의미했다.
골목에 대한 나의 기억 역시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여름, 어린 시절 살았던 외가 마을을 찾았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를 입에 넣는 순간 기억이 피어오르듯, 동네 골목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웃집 아주머니 얼굴, 건너편 집 대문 색깔, 골목 마스코트였던 옆집 삽살개와 골목을 비추던 가로등까지. 비록 오늘날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골목이 품고 있는 그 시절의 온도가 오롯이 느껴져 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새로운 공간으로 주목받는 골목
시대가 변하면서 골목길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한때 도시재개발과 함께 주거 형태가 아파트로 옮겨가면서 외면받던 골목이 다시 활기를 띤 건 1990년대 중반 이후다. 이른바 골목길 문화가 형성되며 소박한 골목에 매력적인 가게와 카페, 음식점이 들어서고 독창적이면서 개성 넘치는 공간을 찾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홍대를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연남동, 연희동, 부암동, 성수동 등 서울 안에서만 30여 곳이 넘는 지역에 골목길 상권이 급성장했고, 전주 한옥마을,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해운대 달맞이고개, 대구 김광석거리 등 지방 도시의 골목도 주목받으며 관광 명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핫 플레이스’로 불리는 요즘 트렌드도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국군재정관리단의 옛 명칭인 육군중앙경리단에서 유래된 ‘경리단길’을 필두로 망원동 망리단길, 송파 송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광주 동리단길 등 작은 골목이 저마다의 특색을 앞세워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낡고 오래된 공간에 개성을 더하고, 골목이 품은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내며 기성세대에겐 추억의 장소로, 젊은 세대에겐 특별한 경험의 공간으로 다가온 것. 허름했던 을지로 인쇄 골목이 레트로의 성지가 되고, 오래된 한옥이 즐비한 익선동 골목을 부러 찾는 오늘날, 골목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골목은
특별하진 않아도, 소소한 것들로 채워진 골목은 매 순간 다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연인, 갓 구운 빵을 내놓는 상인, 화분에 물을 주는 동네 주민, 강아지와 산책하는 노부부까지.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품은 골목에는 소소한 매력이 넘쳐, 그 안에 있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
전 세계 도시의 골목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큰 대로변이나 번화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오래된 골목에 존재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 등장했던 낭만 가득한 파리의 뒷골목, 영화 <해리포터>의 배경이 된 영국 ‘섐블즈(Shambles)’ 골목 등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독특한 풍경의 골목에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달팽이 속도처럼 느리기 그지없는 시간이 시루떡처럼 쌓여 있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곳. 골목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도시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골목 산책은 느린 보폭으로 도시를 탐닉하는 또 다른 방법인 셈이다.
느린 걸음으로, 발길 닿는 대로 골목 곳곳을 산책하는 여유를 만끽해보자. 골목 모퉁이를 돌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이 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설레는 발걸음으로. 골목을 거닐기에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