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초월한 역사 도시
켜켜이 쌓인 시간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 특별한 과거를 만날 수 있는 세계 도시 탐방기.
남미의 숨은 보석
에콰도르 쿠엥카
에콰도르 제3의 도시 쿠엥카(Cuenca)는 중남부 해발 2,500m 고산지대에 위치한다. 안데스산맥의 울창한 숲과 토메밤바(Tomebamba)강이 둘러싸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연중 기후가 온화하고, 깨끗한 환경, 평화로운 분위기 덕에 에콰도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유럽풍의 건축물과 자로 잰 반듯한 도시의 독특한 풍경은 과거 이곳이 스페인 식민지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지어진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치 중세시대 유럽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쿠엥카 대성당은 도시의 상징 같은 곳이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푸른색 돔 천장이 매력 포인트. 1885년 로마네스크와 신고전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답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멋있지만, 성당 뒤편의 작은 꽃시장 거리에서 바라본 모습이 특히 운치 있다. 중앙의 칼데론 광장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엘 사그라리오(El Sagrario) 성당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557년 도시와 함께 건설되어 더욱 의미가 깊은 옛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 중. 골목마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하고, 곳곳에 크고 작은 갤러리와 박물관이 자리해 구경하는 재미를 더한다.
도시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 유럽을 연상시키지만, 곳곳에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디오인의 오랜 전통과 풍습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수공예품이다. 도자기, 세라믹, 직물 등 거리에는 각종 공예품이 전시된 갤러리와 상점이 있다. 가장 인기가 높은 건 이곳의 특산품 파나마모자다. 에콰도르 전통 모자로 토킬라(Toquila)라는 식물의 잎을 이용해 만드는데, 종류도 다양하고 돌돌 말아 보관할 수도 있어 여행객에게 인기 만점. 파나마모자 공방에서 직접 나만의 모자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중세도시 쿠엥카에서의 걸음은 느릴수록 좋다. 고풍스러운 건물, 아기자기한 골목, 유유히 흐르는 토메밤바강과 풍요로운 자연까지, 여유로운 속도로 도시 곳곳을 탐험하듯 누려보자.
흙빛으로 물든 옛 도시
두바이 알 파히디
페르시아만 남동쪽에 위치한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이하 UAE) 7개 토후국 중 최대 도시로 꼽힌다. UAE에서 유일하게 국제무역항을 갖춘 두바이는 중계무역지로 발전하면서 오늘날 중동의 금융 중심지이자 세계를 연결하는 글로벌 허브로 자리 잡았다.
야자수 모양의 인공 섬 ‘팜 아일랜드(Palm Island)’,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 범선 모양의 초호화 호텔 ‘부르즈 알 아랍(Burj Al Arab)’ 등 화려한 건축물과 다채로운 관광 명소가 두바이의 찬란한 오늘을 보여준다면, 알 파히디(Al Fahidi)에서는 두바이의 과거와 조우할 수 있다. 알 파히디 역사지구는 두바이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과거 ‘바스타키아’라고 불렸다. 1900년대 초 두바이 크리크를 중심으로 무역업이 번성하던 시기, 페르시아에서 이주한 상인들이 정착하며 이룬 마을이다. 당시 지어진 전통 가옥 60여 채가 그대로 남아 있어 두바이의 옛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두바이 전통 가옥의 특징은 굴뚝처럼 생긴 바르질(Barjeel), 즉 바람의 기둥이다. 구멍으로 들어온 뜨거운 공기를 차갑게 만들어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는 일종의 천연 에어컨인 셈. 건물 사이가 좁은 것도 그늘을 확보하고 통로 사이로 바람길을 내기 위한 지혜에서 비롯됐다.
덕분에 무더운 날씨에도 알 파히디 골목 탐방은 수월하다. 골목마다 카페와 음식점, 박물관, 갤러리, 기념품 숍이 즐비해 구경하는 재미를 더한다. 새파란 하늘과 모래색 건물이 어우러진 풍경에선 어떻게 찍어도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어두운 밤 골목 풍경은 또 다른 분위기다. 은은한 노란빛의 조명이 더해져 이국적인 매력이 물씬 풍긴다.
오늘날 두바이의 호화로운 풍경과 비교하면 알 파히디는 두바이의 속살에 가깝다. 두바이의 정체성을 품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알 파히디에 발을 디딘 순간, 시간의 속도마저 느려지는 기분에 한 번, 화려함에 가려진 두바이의 색다른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게 될 것이다.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마카오 역사지구
중국 남쪽 해안에 위치한 마카오는 작지만 활기가 넘치는 도시다. 곳곳에는 화려한 건물과 호화로운 리조트가 자리하고, 라스베이거스를 잇는 세계적인 카지노가 즐비해 하루 종일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화려하고 현대적인 마카오의 모습 이면에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품은 역사 도시라는 반전 매력이 공존한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본섬, 마카오 반도 역사지구다.
마카오는 1999년 중국에 반환되기 전까지 포르투갈의 통치하에 있었다. 16세기 중반부터 무려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식민지였던 만큼 곳곳에 포르투갈의 문화와 색채가 짙게 배어 있다. 마카오 본섬에는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와 건축물이 여럿인데, 이를 통틀어 마카오 역사지구라고 부른다. 지난 200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마카오 역사지구 여행의 시작과 끝에는 세나도 광장이 있다. 도시의 중심지에 자리한 세나도 광장은 아름다운 분수와 촘촘한 타일 바닥, 주변을 둘러싼 고풍스러운 건축물 덕에 마치 유럽 속 광장을 연상시킨다. 각종 상점과 음식점이 즐비해 휴식을 취하기도 좋고, 주요 관광지까지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세인트폴 유적지도 그중 하나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세인트폴 성당은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1835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은 정면 파사드와 성당 앞 66개 계단만이 남았다. 성당 외벽만 있는 탓에 뻥 뚫린 창문 사이로 파란 하늘이 액자처럼 걸려 있어 잊지 못할 풍경을 선사한다. 근처에 위치한 육포 거리도 꼭 들러야 할 필수 코스다.
도시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몬테 요새를 추천한다. 1626년 포르투갈 군이 도시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이곳에는 성벽을 따라 설치한 22개의 대포가 여전히 건재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벽은 그 자체로 전망대 역할을 한다. 마카오 시내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다. 17세기 요새에서 오늘날의 마카오 전역을 바라보는 특별함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닐까.
마지막 왕조의 흔적을 찾아
베트남 후에
베트남만큼 친근한 여행지가 또 있을까. 하노이, 다낭, 달랏, 푸꾸옥 등 익숙한 도시만 해도 여럿이다. 게다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매력적인 여행지가 곳곳에 숨어 있어 즐거움을 더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베트남 중부 도시, 후에(Hue)다.
후에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역사 도시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였던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로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견할 만큼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 후에 왕궁은 응우옌 왕조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일 만큼 거대한 왕궁은 둘레 2,500m, 높이 6.5m에 달하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최전성기 시절에는 전각과 누각을 비롯해 건물만 15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여러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건물 대부분이 파손됐고, 현재 볼 수 있는 건 전체의 25%뿐. 그럼에도 곳곳을 모두 둘러보려면 꼬박 반나절은 소요된다. 중국의 자금성과 프랑스, 유럽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건축물이 한데 어우러져 동서양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왕궁의 복원 작업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는 중.
후에에는 총 7개의 황릉이 있는데, 대부분 흐엉강 변에 밀집해 있다. 황릉마다 특징이 뚜렷하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건축양식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그중 12대 카이딘 황제릉은 단연 독보적이다. 금과 보석, 색유리 등을 사용해 극강의 화려함이 특징. 청동에 금박을 입힌 등신상과 온통 금색 자기와 색유리로 장식한 내부는 눈부실 정도로 현란하다. 식민지 시절 지어져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유럽과 아시아, 전통과 현대 양식의 조합이 특징이다. 반대로 4대 뜨득 황제릉은 베트남 전통 황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베트남 전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황릉으로 꼽히는데, 규모가 12만㎡에 이를 만큼 거대하다. 능이라기보다 궁전에 가까운 형태인데, 실제 뜨득 황제가 이곳에서 업무를 보고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여러 황릉을 둘러보려면 보트 투어가 제격이다. 흐엉강을 따라 보트를 타고 강 주변의 황릉과 사원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베트남의 웅장한 역사와 동서양이 어우러진 문화, 아름다운 자연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후에에서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참고로 후에는 다낭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