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기념하는 일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건 기쁜 일이다. 그만큼 의미 있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뜻일 테니까. 그것이 우리가 기념일을 기다리는 이유가 아닐까.

달콤함 뒤에 숨은 기념일의 비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일을 꼽으라면 단연 밸런타인데이일 것이다. 봄의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찾아오는 기념일이기에 더욱 반가운 밸런타인데이.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고 알려졌는데, 꼭 사랑 고백이 아니더라도 동료나 친구, 가족, 소중한 사람에게 소소한 선물로 마음을 전하는 만인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밸런타인데이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지만, 성 발렌티노 축일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3세기 로마에는 결혼 금지령이 내려졌다. 황제는 전쟁터에 나갈 남자를 징집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데 결혼이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 발렌티노 주교는 황제 몰래 병사들의 결혼을 성사시켜주었고, 그 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 순교일이 2월 14일, 오늘날 전 세계인이 기념하는 밸런타인데이의 시작이 됐다.
화이트데이는 남성이 여성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날이다. 선물하는 주체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선물의 대상이 초콜릿에서 사탕으로 바뀌었을 뿐, 밸런타인데이와 흡사하다. 실제 화이트데이는 1980년, 일본의 전국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이 밸런타인데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기념일이라고 한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는 문화도 19세기 영국 초콜릿 회사 ‘캐드버리(Cadbury)’에서 시작됐다. 당시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출시한 초콜릿 상자가 인기를 얻으면서 대표적인 선물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것. 1936년 일본 제과업체의 광고는 밸런타인데이를 ‘연인의 날’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는 날’로 바꿔놓았다.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날이 특별하게 포장되어 달력을 빼곡히 채우는 요즘. 일각에선 상업적으로 탄생한 각종 기념일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른바 ‘데이 마케팅’으로 생겨난 기념일이다. 4월 14일 블랙데이, 5월 14일 로즈데이,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등이 대표적이다. 때론 농가의 소비 촉진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3월 3일을 삼겹살데이, 6월 4일을 육포데이로 만들거나, 화이트데이는 백설기데이로, 빼빼로데이는 가래떡데이로 지정해 우리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특별한 걸 좋아한다면 하나하나 챙기는 기쁨이 있을 테고, 의미가 없다 싶으면 웃고 넘기면 될 일이다. 지나친 허례허식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소비에 명분 하나 얹는다면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이 될 터. 모든 날이 특별하고 즐겁길 바라는 건 만든 사람이나 즐기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사랑과 존경, 위로와 감사 가득한 5월
5월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는 뜻깊은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 등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이 수두룩하다. 1993년 UN총회에서는 ‘건강한 가정을 통해 평화로운 인류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매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늘 가까이에 있기에 표현하지 못했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하기 좋은 기회기도 하다.
아이들이 5월을 손꼽아 기다리는 건 5월 5일 어린이날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 가는 대신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선물도 받을 수 있으니 기다려질 수밖에.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만들었다는 건 잘 알려졌지만, 그가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많다. 그는 ‘어린 사람’이란 뜻의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아동을 한 인격체로 대할 것을 주장했다. 덕분에 아동 존중 사상이 널리 퍼졌고, 어린이 인권 증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 세계에는 부모님을 기리는 특별한 날이 많지만, 어버이날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념일이다. 대부분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따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날이었다. 1956년 해방 후 양육과 생업을 짊어진 어머니들의 노고를 기리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아버지들의 서운함이 날로 커졌다는 것. 이에 1973년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를 아우르는 어버이날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존경과 감사를 전하는 스승의날은 어떨까. 세계의 많은 나라가 UN이 정한 ‘세계교사의날(10월 5일)’을 기념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5월 15일을 스승의날로 지정했다. 바로 이날이 세종대왕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야말로 참된 스승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충남 강경 지역의 청소년적십자 회원들이 전현직 선생님을 찾아가 감사를 전하던 것에서 시작된 스승의날은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진 날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밸런타인데이부터 가정의 달을 촘촘히 수놓은 각종 기념일이 어느 때보다 풍성한 계절이다. 모든 기념일을 다 챙길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의미에 대해 한번쯤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마음을 표현해보자. 편지와 선물로 고마움을 전하거나 전화 한 통에 반가운 목소리를 실어 보내거나. 그리하여 모두에게 이 봄이 따뜻하고 행복하게 기억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