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탐나는 런던
우아한 실루엣의 찻잔에 말간 홍차가 찰랑이고, 화려한 꽃무늬를 수놓은 접시 위 달콤한 디저트가 먹음직스럽게 유혹한다. 눈으로 음미하는 식탁 위 풍경이 말해주듯, 좋은 그릇은 귀하게 대접받는 기분을 선사한다. 영국의 테이블웨어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중국의 차(茶)는 서양 식기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꿨다. 유럽인에게 차는 매혹적인 음료였고, 차를 마시기 위해 도자기로 빚은 찻잔이 식탁을 점령했다. 특히나 영국인의 차 사랑이 대단했다. 18세기 융성한 홍차 문화를 꽃피우며 영국의 전통으로 상징되는 애프터눈 티가 생겨났다. 영국의 상류층과 중류층은 애프터눈 티타임을 집에서 가졌는데 이는 경쟁적으로 도자기 수집에 열을 올리는 계기가 됐고, 화려한 분위기의 고급 테이블웨어 수요가 급증했다. 하지만 영국은 여느 유럽 국가와 달리 도자기를 자체 생산할 수 없는 큰 걸림돌이 있었다. 자기의 핵심 비법인 카올린(고령토)이 생산되지 않아 구할 수 없었던 것.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영국은 유럽 대륙의 도자기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카올린 대신 동물의 뼈를 재로 만든 골회를 배합한 본차이나(Bone China) 자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명가
산업혁명을 이뤄낸 나라답게 영국은 수작업에 의존해야 하는 도자기 생산 방식도 획기적으로 바꿨다. 웨지우드(Wedgwood)는 업계 최초로 양산화에 성공하며 영국의 도자기 산업을 번창시킨 주역이다. 당시 상류층이 사용하는 고급 자기와 달리 기계로 대량 생산해 서민들의 식탁 위에도 도자기가 오를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 크림웨어(Cream Ware)다. 지금도 영국인은 손님 접대나 정찬용 식기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본차이나를 사용하는 반면 크림웨어는 어느 가정에서나 일상 속 실용적인 식기로 애용된다. 웨지우드는 수준 높은 크림웨어를 제작하면서 ‘퀸즈웨어(여왕의 도자기)’라는 명칭을 부여받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웨지우드의 대명사는 재스퍼웨어다.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그리스와 로마 신화를 모티프로 한 신고전 양식은 웨지우드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로열 크라운 더비(Royal Crown Derby)는 ‘로열’과 ‘크라운’ 왕실 관련 명칭을 동시에 보유한 유일한 브랜드다. 프랑스의 명품 자기 세브르의 영향을 받아 호화로운 금채와 앤티크한 매력이 돋보이는 격조 높은 디자인을 선보인다. 웨지우드나 스포드(Spode)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식기를 만들 때도 로열 크라운 더비는 왕족과 귀족을 위해서만 제작되었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로열 앙투아네트’ 찻잔은 우아함의 절정으로 손꼽힌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기교가 돋보이는 로열우스터(Royal Worcester)는 영국 자기업계 최초로 로열 워런트(왕실 납품 허가증)를 취득한 뒤로 지금까지 역대 왕으로부터 모두 받은 유일무이한 업체다. 스포드와 합병한 뒤 현재 포트메리온 그룹 산하에 속한다.
개미지옥보다 더한 그릇 쇼핑
실물을 마주한 순간, 견물생심이 발동되며 내 안에 경고음이 울린다. 구매하자니 가격이 망설여지고, 돌아서자니 눈앞에 자꾸 아른댄다. 평소 ‘그릇엔 관심 없어’를 외치던 이도 이럴진대 그릇 모으기가 취미인 사람들에게 런던은 그야말로 득템을 향한 끝없는 욕망이 분출하는 도시다. 일단 눈요기라도 실컷 할 요량으로 나이츠브리지역 인근의 해러즈(Harrods)로 향했다. 1849년 설립된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쇼핑 명소 중 하나로, 대대로 영국 왕실 전용 백화점이었다. 아르데코 양식의 호화로운 7층 건물에 들어서면 별천지가 따로 없다. 좋은 것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말 그대로 귀하기 때문임을 이곳에 들어서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3층에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명품 그릇 매장이 한데 모여 있어 둘러보기 편리하다. 웨지우드, 빌레로이앤보흐, 로얄코펜하겐을 비롯해 에르메스, 디올 등 주방을 가득 채우고 싶은 테이블웨어를 구경하느라 한 걸음 떼기도 힘들다. 리젠트 스트리트에 위치한 리버티 런던(Liberty London) 역시 그릇에 관심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1920년대 세워진 목조 건물에서 풍겨오는 클래식한 분위기는 쇼핑의 품격을 한 차원 끌어올린다. 영국 부호의 개인 집무실에 들어온 듯한 아늑한 실내 공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을 연상시킨다.
쉽사리 지갑을 열 수 없는 백화점과 달리 런던의 앤티크 마켓은 흥정을 하며 보물 같은 그릇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노팅힐의 명물인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라 가격은 다소 비싼 감이 있지만 앤티크 소품부터 식기 등 제품 종류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길거리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토요일만 열리며 오전 11시 이후엔 매우 혼잡해 이른 오전 시간에 둘러보는 게 낫다. 매주 금요일 오전에 열리는 버몬지 스퀘어 앤티크 마켓(Bermondsey Square Antiques Market) 역시 앤티크 그릇 수집가들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런던에서 그릇 쇼핑의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고르라면 단연 스토크온트렌트(Stoke-on-Trent)다. 런던 유스턴역에서 특급열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자리한 도자기 마을로, 영국 도자기의 탄생과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포트메리온부터 웨지우드, 버얼리(Burleigh) 등 영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회사의 팩토리 숍은 시중의 절반 가격으로 구입 가능한 쇼핑 천국이다. 특히 영국의 프리미엄 티웨어 브랜드 버얼리와 근사한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는 웨지우드는 반드시 들러야 한다. 핀란드 피스카스 그룹에 속한 웨지우드 팩토리 숍에서는 웨지우드를 비롯해 로열덜턴, 로열알버트, 로얄코펜하겐, 이딸라 등 피스카스 그룹의 도자기 브랜드 제품도 30~5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다만 스토크온트렌트의 팩토리 숍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 힘들다. 그릇 쇼핑에 진심이라면, 렌터카를 이용해 둘러보길 적극 추천한다.
산타의 선물 보따리 같은 메이페어
만약 런던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를 거닐고 싶다면, 더욱이 그 시기가 연말연시라면 무조건 메이페어(Mayfair)로 향해야 한다. 우중충한 런던의 잿빛 겨울 하늘도 메이페어의 화려한 조명 앞에서는 꽤 낭만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런던 한복판 웨스트민스터 자치구에 자리한 메이페어는 조지 왕조 시대의 붉은 벽돌 타운하우스가 말해주듯 런던의 품격과 부유함이 넘쳐 흐른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과 고급 부티크 매장으로 채워진다. 런던 만남의 광장으로 불리는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와 럭셔리 고급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본드 스트리트(Bond Street), 햄리스(Hamleys), 리버티 런던(Liberty London)과 같은 플래그십 스토어가 돋보이는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와 스타일리시한 감각이 넘쳐흐르는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reet)가 메이페어를 보물처럼 에워싼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메이페어 거리는 1년 중 가장 성대한 일루미네이션의 향연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 리젠트 스트리트는 천사를 형상화한 조명을 매다는 것이 전통이다. 거대한 푸른 리본이 반기는 마운트 스트리트(Mount Street)는 각종 장식품을 구매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층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자리한 셀프리지스(Selfridges) 백화점은 크리스마스마다 감각적인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선보이고, 메르카토 메이페어(Mercato Mayfair), 코노트 호텔, 클라리지스 호텔 앞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다. 특히 메르카토 메이페어는 요즘 런더너가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다. 옛 교회를 레노베이션해 바와 레스토랑이 가득한 푸드 홀로 대변신한 공간이다. 마치 진짜 예배를 보는 교회에서 술과 음식을 맛보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 만큼 상당히 독특하고 이색적이다.
메이페어 쇼핑의 꽃이라 불리는 포트넘앤메이슨(Fortnum&Mason) 백화점은 티타임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차와 비스킷, 초콜릿으로 채워진 G층과 포트넘앤메이슨에서만 볼 수 있는 티웨어를 비롯한 각종 식기를 만날 수 있는 1층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만큼 취향 저격이다. 참고로 알아두자면, 런던 여행 선물 1순위로 꼽히는 포트넘앤메이슨의 가장 인기 있는 차는 애프터눈 티 블렌드, 얼그레이 클래식, 로열 블렌드, 브랙퍼스트 블렌드, 스모키 얼그레이, 퀸앤이 유명하다. 건물 4층의 티 살롱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겨보는 것은 런던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5성급 호텔 중 하나인 클라리지스(Claridge’s)는 포트넘앤메이슨과 함께 메이페어를 대표하는 정통 애프터눈 티를 맛볼 수 있는 장소로, 맛과 분위기 모두 완벽한 조합을 이룬다.
그릇을 통해 들여다본 런던은 없던 소유욕도 샘솟게 할 만큼 매력으로 가득하다. 나를 위해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차리는 식탁 위 풍경을 떠올리며, 나만의 취향을 오롯이 담은 그릇을 발견하는 기쁨은 행복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