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추억, 이야기가 머무는 곳
수많은 삶과 이야기가 담긴 시장, 그 역사와 의미를 찾아서.
어린 시절,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오면, 어김없이 엄마와 시장을 찾았다. 두부 한 모 정도 필요했다면 집 앞의 슈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었겠지만, 시장에 간다는 건 뭔가 특별한 메뉴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시장에 가는 게 좋았던 건 당시 최애 놀이기구, ‘방방’ 때문이었다. 요즘이야 키즈카페에 널린 게 트램펄린이지만, 당시엔 시장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귀한 놀이기구였다. 신나게 방방 한 판 뛰고 나면 어느새 장을 다 본 엄마가 손짓하며 이름을 부르곤 했다.
시장에 가면 반은 아는 사람, 나머지 반은 곧 알게 될 사람. 상인 중에는 내 친구 엄마도 있고, 우리 엄마 동창도 있고, 내 동생 친구 아빠도 있다. 시금치 한 단에는 야채가게 아주머니의 최근 근황이, 생선 한 마리에는 자식의 시험 성적 얘기가 따라온다. 시장 한 바퀴 돌고 나면 쓴 돈보다 들은 얘기가 더 많을 정도. 물건 하나에도 이야기보따리 가득, 하나를 사면 두 개를 더 주는 인심은 덤. 시장은 늘 이야기가 넘치고 웃음이 넘치는 인싸력 테스트의 장과 같았다.
집 뒷골목에 오래된 시장이 있어 지금도 종종 시장에 간다. 추석이 다가오니 진열대를 채운 사과며 배, 감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정육점은 고기를 사러 온 손님들로 북적이고, 생선가게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오징어를 두고 눈치게임이 시작된다.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안에 있으니, 덩달아 텐션이 높아지는 기분. 솔솔 나는 깨소금 냄새에 어릴 적 엄마와 방앗간에서 참기름 짜던 기억,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떡을 보고는 인절미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젖어보기도 한다. 몽글몽글 떠오르는 추억에 웃음 짓고, 오늘을 살아가는 생동감에 힘을 얻는 시간.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찾으면 언제나 위안이 되는 이곳, 나는 오늘도 시장에 간다.
시장에 어제와 오늘이 있다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시장의 기능은 언제나 동일하다. 필요한 물품의 거래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의 풍경, 판매하는 상품, 그리고 상인과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다르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생성과 소멸, 발전을 반복해왔다. 따라서 시장의 역사 속에는 그 시절,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다양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장은 시대와 사람들의 생활이 진열되어 있는 창이며, 그 시대 경제와 생활 문화의 꽃을 피우는 쇼윈도와 같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여행을 가면 꼭 시장에 들러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에 가면 지역 특산품을 만날 수 있고, 현지인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이 이 계절에 먹는 음식과 좋아하는 것, 요즘 유행하는 문화를 알 수 있고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지역적 특색을 알아내기도 한다. ‘그 나라의 현재를 알고 싶다면 시장에 가라’는 말처럼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기능적 측면을 넘어 한 나라, 특정 지역의 문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깊게 알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공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의 교환과 거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개인이 모두 만들어 쓸 수 없었기에 서로 필요한 물건을 맞바꾸는 교환과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물건의 교환과 거래가 점차 확산되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일정한 장소에 시장이 형성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시장이 들어섰을까? 옛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가장 큰 재난이었던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초토화되고 물자가 귀해지면서 생활필수품을 구하기 위해 곳곳에 물건을 교환하는 시장이 형성됐다. 다만 당시의 시장은 필요할 때만 문을 여는, 즉 비정기 형태를 띠고 있었다. 시장 형성에 큰 변화를 가져온 건 조선시대 납세제도인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다. 그전까지는 국가에 세금을 낼 때 곡식, 약초, 동물의 가죽 등 자신이 생산했거나 갖고 있는 현물을 내면 됐지만,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모든 세금을 쌀로 내야 했다. 즉, 쌀이 화폐 역할을 하게 된 것. 때문에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쌀로 바꿀 공간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정기적으로 문을 여는 시장이 만들어졌다. 시장은 대체로 5일에 한 번 열리는 오일장이 보편적이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5일의 리듬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이 성경에서 유래된 일주일, 즉 7일 주기의 리듬으로 생활했던 것과는 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시장은 다양한 기능을 갖춘 공간으로 변모했다. 다른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만나는 사교의 장으로, 놀이패들의 놀이를 즐기는 오락의 공간으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는 공간으로 시장은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때론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도 시장이 활용됐다. 서양에서 중죄인의 처벌이나 마녀사냥이 광장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시장이 광장의 역할을 대신했던 것. 죄인의 공개 처형은 백성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당대의 가치관과 지배 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이처럼 시장은 단순하게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과 이야기가 응축된 곳이다.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상징적인 장소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시장의 진화, 계속되는 이야기
요즘 사람들은 ‘장을 보러 간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마트를 떠올린다. 대형마트는 접근성과 편리성을 무기로 빠르게 성장했고, 마트에서 장 보는 일이 당연해졌다. 더 나아가 이제는 온라인으로 장 보는 게 대세다. 팬데믹이 확산되면서 비대면으로 가능한 ‘온라인 장 보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파 한 단, 마늘 하나도 직접 눈으로 보고 꼼꼼하게 따져가며 장을 봤던 기성세대에게는 놀라울 법하지만, 이제 손가락만으로 장 보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마트의 등장과 온라인 주문의 일상화로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줄어들었다. 마트와 인터넷에 손님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시장의 반격은 공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면서 새로움을 더해 공간의 기능을 확장했다. 시장은 낡고 오래됐다는 편견을 깨고 젊은 감각으로 무장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경험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게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다. 시장이 생소한 젊은 세대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되고, 옛 추억을 간직한 기성세대에게는 새로움으로 다가온 것.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다른 분야와도 협업하며 진화하고 있는 시장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시장의 진정한 가치는 그저 오래된 역사에만 한정할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삶의 애환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세월의 흐름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도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한, 시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