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허락한 여정, 히말라야 트레킹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은 천근만근이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순간, 말갛게 갠 하늘 아래 히말라야의 고고한 설산 고봉들이 영롱한 자태를 드러낸다. 초보 트레커의 푸념 섞인 후회는 이내 찬탄의 환희가 되어 온 마음을 메아리친다.
히말라야는 고산(高山)계의 ‘어나더 레벨’이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세계 8,000m급 산들은 모두 히말라야 산맥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좌 가운데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있다. 언뜻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 같지만, 히말라야는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제법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초보 트레커가 오를 만한 트레킹 코스도 다양하다. 문제는 타이밍. 날씨가 좋은 봄과 가을은 인파로 넘쳐나기에 차선책으로 12~2월 겨울 비수기를 노려볼 만하다. 유독 한국인이 많이 찾아 ‘코리안 성수기’로도 불린다. 추위와 폭설이 복병이지만 한낮의 걷기 좋은 기온과 말간 하늘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걸린 설산을 조망하기엔 최적기다.
이제 체력에 따른 코스를 정할 차례.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인 안나푸르나는 계절별로 다채로운 경관을 조망하며 초보자도 걷기 좋고, 랑탕은 순수한 자연 본연의 풍광이 아름다우며, 에베레스트는 웅장한 대자연의 민낯을 만날 수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이 처음이라면 안나푸르나 코스가 제격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시작과 끝, 포카라
포카라는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트레커들의 집합소다. 산행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부터 산악인 못지않은 상급자까지, 각자의 보폭으로 ‘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 안나푸르나를 누비기 위해 포카라를 찾는다. 시간이나 체력, 경험치에 따라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다양하지만 3개 코스가 인기다. 안나푸르나 파노라마 뷰를 조망할 수 있는 푼힐 전망대를 목적지로 한 푼힐 코스는 짧지만 임팩트 있다.
차량 이동과 트레킹이 적절히 가미돼 초보자도 무리 없이 도전할 만하다. 가장 대중적인 코스이자 산 좀 탄다 싶은 이들에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혹은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코스가 적당하다. 대략 일주일 남짓 하루 평균 5~6시간에 걸쳐 10㎞의 산행이 이어진다. 푼힐 코스와 겹치는 구간이 있어 요즘엔 푼힐+ABC 코스가 인기다. 마지막으로 안나푸르나 산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서킷 코스는 3주가 소요되는 만큼 많은 시간과 체력이 요구된다.
트레킹 코스를 정했다면 퍼밋(입산허가증)과 팀스(트레커 정보 관리 시스템)를 발급받아야 히말라야에 입성할 수 있다. 일종의 입장료와 포터를 위한 보험 격인데,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이드와 포터 고용은 필수다. 전문 여행사를 통하면 트레킹에 필요한 서류며 코스, 식사, 숙소 걱정 없이 오로지 걷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어 편하다.
트레킹을 떠나려는 자와 이제 막 오지에서 돌아온 이들은 페와(Phewa) 호수 인근의 레이크사이드로 모여든다.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 숙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여행자들의 휴식처다. 포카라를 상징하는 페와 호수는 히말라야 만년설이 빚어냈다. 비록 영롱한 물빛은 아니지만 고요한 수면 위로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반영이 시시각각 드리운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풍경이라면, 산을 오르지 않고 바라만 봐도 좋지 않을까. 초보 트레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말라야는 묵묵히 호수 속으로 침잠할 뿐이다.
푼힐 전망대를 향하여
포카라에서 푼힐 코스의 출발 지점인 나야풀까지 산악용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여정이 시작된다. 보통은 나야풀-티케둥가-울레리-고라파니-푼힐 전망대 순으로 올랐다 다시 고라파니로 내려와 타다파니-간드룩으로 하산해 차량을 타고 포카라로 복귀한다. 3박 4일간 함께 동고동락할 일행들과 각자의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남짓 되었을까,
눈앞에 촘촘히 쌓아 올린 가파른 계단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말로만 듣던 계단지옥의 서막이다. 클라이맥스는 일명 ‘마의 3천 계단’으로 불리는 티케둥가에서 울레리 구간이다. 3,280개의 돌계단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진다. 막상 계단을 오를 땐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러 왔나’ 후회가 밀려들지만, 가파르고 험난한 돌길을 걷고 나면 그나마 돌계단이 나았구나 싶다. 오르막길부터 내리막길, 흙길, 돌길, 끝없이 이어진 계단까지 어디 하나 쉬운 구간이 없지만, 이 또한 트레킹의 묘미 아니겠는가. 힘들 땐 바람 소리, 계곡 물소리, 풀냄새를 맡으며 잠시 쉬어 가면 그뿐. 힘에 부칠 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박한 찻집도 든든한 길 위의 지원군이다.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두고 달콤쌉싸래한 생강차 한잔을 마시며 경이로운 안나푸르나 남봉을 말없이 바라보노라면 두 다리에 불끈 힘이 솟는다.
티케둥가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2일 차는 푼힐 전망대 최종 관문인 고라파니까지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빼꼼히 고개만 내민 히운출리가 매력적인 울레리를 거쳐 반단티를 지나자 무성하고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하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나무가 빽빽한 숲길을 1시간 남짓 걷고 나면 일순 시야가 탁 트이며 설산 고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티케둥가를 출발한 지 반나절 만에 다울라기리 고봉이 반겨주는 고라파니에 도착했다. 가벼운 두통 증세가 있어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연거푸 들이켰다. 고산병에 가장 좋은 치료제는 하산뿐이라는 말에 샤워 대신 물티슈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닦아낸다. 내 생에 가장 높은 곳에서 맞이할 내일의 일출을 기대하며,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보온병을 끌어안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인생 일출을 만나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따뜻한 침낭을 빠져나와 푼힐 전망대에 오를 채비를 서두른다. 헤드랜턴을 켜고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잘 정비된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기 시작했다. 일출을 놓칠세라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가이드는 “비스따리, 비스따리(천천히, 천천히)”를 연발한다.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이라도 접질렸다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 있으니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칠흑 같던 어둠이 한 꺼풀 벗겨질 때쯤, 푼힐 전망대에 도착했다. 어둑어둑한 새벽이지만 전망대엔 일출을 보려는 인파로 가득하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그제야 안나푸르나 연봉(連峯)이 하나둘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왼쪽으로 다울라기리, 오른쪽으로 안나푸르나 그리고 물고기 지느러미를 닮은 마차푸차레까지 30개가 넘는 히말라야 설산이 빚어내는 장관은 마치 드넓은 바다를 보는 것처럼 장쾌하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 대신 순백의 봉우리가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만 다를 뿐.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이 순간의 감동을 오롯이 전달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엄한 ‘인생 일출’을 뒤로하고, 다시 고라파니로 내려와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셋째 날은 데우랄리에서 반단티를 거쳐 타다파니까지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만만찮은 구간이다. 당혹스러우리만치 심한 내리막길의 연속이라 마음을 쉬 놓을 수 없다. 새벽부터 몸을 움직인 탓에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그럴 때마다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보며 남은 힘을 쥐어 짜내본다. 대략 10시간이 넘는 강행군 끝에 타다파니에 도착했다. 로지에 짐을 풀고 나서야 비로소 무사히 하산했음에 안도감이 밀려든다. 트레킹 마지막 날은 전날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한결 여유롭다. 아침을 먹기 전, 따뜻한 차 한잔을 들고 볕 좋은 숙소 마당에 나와 파노라마 뷰를 원 없이 감상하는 호사도 누린다. 봄이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호젓한 랄리구라스 나무 숲길과 울창한 산림을 지나는 동안 마차푸차레는 점점 멀어져간다. 마침내 포카라로 데려다줄 차량이 기다리고 있는 간드룩에 도착했다. 네팔 현지인들도 국내 여행지로 찾을 만큼 말끔하게 잘 정비된 마을을 둘러보며 3박 4일간의 푼힐 전망대 트레킹은 끝이 났다.
짧다면 짧은 일정이지만 초보 트레커가 히말라야를 체험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시 모르면 용감하다고, 체력적으로나 산행 경험 모두 준비가 미흡했음을 통감했다. 그럼에도 괜찮은 여정이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히말라야에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자연의 품에 안겨 위안받고 싶을 때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히말라야를 찾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