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드리운 골목
오래된 골목길이 주는 익숙함 속 생경함을 찾아서.
순백의 골목 사이에 피어난 꽃,
스페인 프리힐리아나
따사로운 지중해 햇살이 바삭바삭 부서져 내리는 ‘태양의 해안’ 코스타 델 솔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휴양집니다. 안달루시아 지방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마다 새하얀 마을이 자주 눈에 띄는데요. 이 지역 전통 주택 양식인 푸에블로 플랑코 영향 때문입니다. 그중 모범답안으로 불리는 곳이 미하스와 프리힐리아나인데요. 미하스가 고급 휴양지 느낌을 풍긴다면, 프리힐리아나는 소담한 전원 마을에 가깝습니다.
경사진 언덕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찬 하얀 주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벽과 창문마다 채도 높은 꽃 화분을 내걸어 마을의 미감을 극대화합니다. ‘스페인의 산토리니’라는 별명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듯. 눈부시게 흰 담벼락을 타고 진분홍 꽃송이 넝쿨이 흐드러지게 피고, 파스텔 톤으로 정갈하게 단장한 오래된 대문 양옆으로 초록을 머금은 화분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말갛기 그지없고, 망망대해 지중해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골목을 휘감아 돌다 이내 자취를 감춥니다. 골목 중간중간 가정집을 개조한 소소한 기념품 상점과 여행객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노천카페가 골목 여행의 즐거움을 더합니다. 이웃과 나누는 사사로운 대화 소리부터 볕 잘 드는 화분에 기대 나른함을 좇는 고양이의 한갓진 여유까지, 진부한 클리셰 같지만 프리힐리아나 골목은 한 장의 그림엽서 같은 풍경 그 자쳅니다.
오렌지빛 노을이 머물다간 자리,
포르투갈 리스본
허물어질 듯 낡고 닳은 벽면을 채우는 그라피티와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돌바닥, 빨래가 나부끼는 발코니, 무심한 듯 내놓은 올리브나무 화분과 때때로 울려 퍼지는 구슬픈 음색의 파두가 조붓한 골목을 따라 흐릅니다. 골목대장처럼 느릿느릿 언덕을 오르내리는 노란색 트램도 빼놓을 수 없죠. 골목 구석구석 사람들의 발이 돼주는 트램은 리스본의 상징이자 로망입니다. 현지인에겐 평범한 일상의 배경일 테지만, 여행자 눈에는 더없이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장면입니다.
테주강 하구에 자리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언덕으로 이뤄진 도시에요. 그 말인즉 골목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어디서나 전망대 못지않은 도시 경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도시를 여행하는 방식은 둘 중 하납니다. 걷거나 트램을 타는 것. 도보 여행을 원한다면 알파마 지구를 추천합니다. 작은 상점이 많아 골목을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죠. 포르투갈 대표 음악인 파두를 공연하는 식당도 많고,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리스본은 가히 환상적인 뷰를 자랑합니다. 덜컹대는 트램의 매력을 느끼고자 한다면 도심 한복판의 관광 명소를 오가는 28번 트램이 제격입니다. 루아 다 팔마, 상 조르주 성, 리스본 대성당을 거치는 총 10km에 달하는 구간은 로맨틱한 리스본 골목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인기 노선입니다.
황톳빛으로 물든 시간의 흔적,
이란 야즈드
지평선 너머로 황량한 모래 먼지만 불어올 뿐 생명의 인기척을 찾을 수 없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터전을 일궈 실크로드의 집결지로 번창했고, 중세 이슬람 왕조를 거치며 현재의 경관을 완성한 도시, 야즈드입니다. 야즈드는 흙을 빚어 세운 도신데요. 구시가지 격인 올드시티는 이슬람 왕조시대에 지어진 옛 성곽도시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늘날까지 도시가 건재할 수 있었던 건 40℃를 넘나드는 건조한 기후 덕분인데요.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하는 존재가 동시에 도시를 지탱해준 일등 공신이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올드시티의 골목은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를 연상시킵니다. 도시의 심장인 아미르 차크마크 콤플렉스 인근의 시장 뒤편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아치형 골목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요. 맹렬하게 쏟아지는 사막의 태양과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지붕 덮인 골목도 간간이 눈에 띕니다. 문제는 다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인다는 것이죠.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돼 슬쩍 한눈이라도 팔라치면 영락없이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쑵니다. 애당초 길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골목 구경에 나서는 것이 속 편할 수 있어요. 골목을 걷다보면 야즈드의 건물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로 지붕마다 이고 있는 굴뚝처럼 생긴 윈드캐처입니다. 윈드캐처는 사방으로 뚫린 구멍을 통해 집 밖을 지나는 바람을 잡아 집 안으로 내려보내는, 페르시아제국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냉방 시스템인데요. 척박한 환경 속에서 터득한 선대의 지혜로움이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억겁의 세월을 견뎌온 과거와 현재의 삶이 야즈드의 골목 위를 나란히 걷고 있는 듯합니다.
흔들릴 듯 말 듯 홍등의 유혹,
대만 지우펀
‘지우펀이 아니라 지옥펀 아니야?’ 우스갯소리치곤 뼈가 있는 한마딥니다. 한편으론 그만큼 인기 있는 여행지라는 방증일 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좁고 가파른 골목을 마치 출근길 지옥철 인파에 휩쓸리듯 구경해야 하는 현실 푸념인 셈이죠. 사람들이 지우펀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해 질 무렵 하나둘 불을 밝히는 홍등 행렬을 보기 위해섭니다. 과거 지우펀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오지 중의 오지였어요. 그러다 일제 식민 치하에 광산촌으로 번성했고, 급기야 광부들을 유혹하는 식당과 주점, 찻집이 우후죽순 늘어나며 화려한 홍등 거리가 조성됐죠. 당시 ‘작은 상하이’ 또는 ‘작은 홍콩’이라 불릴 만큼 황금기를 구가했지만, 일본의 패망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 폐광촌으로 전락했어요. 이후 1990년대 관광지로 개발되며 재기에 성공해, 오늘날 대만의 인기 여행지 반열에 올라서게 됐죠.
지우펀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거리는 파출소와 관광객센터가 자리한 수치루예요. ‘험한 산길’이라는 뜻처럼, 돌계단으로 이뤄진 오르막길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닙니다.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점들을 구경하는 와중에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가 아메이 찻집인데요. 지우펀을 유명한 도시로 만들어준 영화 <비정성시>의 촬영지이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프가 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후자는 낭설에 가깝지만, 사실이야 어찌 됐든 처마 아래 주렁주렁 홍등을 매단 아메이 찻집의 전경은 가히 클라이맥스라 하고 싶을 만큼 몽환적입니다. 수치루가 풍경 맛집이라면, 지산제는 길거리 맛집 골목입니다. 지우펀 여행의 시작점이라 불리는 거리로, 아기자기한 기념품부터 다채로운 대만의 길거리 간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