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한 끌림, 사이판 포비든 아일랜드
운동화 끈 질끈 묶고 거친 대자연이 숨 쉬는 ‘금단의 섬’으로 향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험준한 동굴을 지나 바다로 뛰어드는 일련의 과정은 고생이라기엔 너무도 짜릿한 모험 그 이상이었다.
휴양과 액티비티. 사이판 하면 으레 떠오르는 단편적인 이미지다. 따지고 보면 그 이상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계절 어느 시기에 방문해도 평타 이상의 즐거움이 보장된, 게다가 4시간 비행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사이판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이판은 티니안, 로타와 함께 북마리아나 제도를 대표한다. 14개의 섬 가운데 수도 역할을 담당하지만, 면적은 고작 제주도의 10분의 1 남짓하다.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데 30분 정도다.
그럼에도 보고 즐길거리는 차고 넘친다. 사이판의 호텔과 리조트, 주요 관광지는 해변이 아름다운 서쪽 바다에 몰려 있다. 반면 동쪽 바다는 조류와 파도가 강해 사람의 발길이 뜸한 편. 만세절벽과 버드 아일랜드, 한국인 위령탑 등 역사와 관광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북부와 현지인이 주로 찾는 레더 비치를 필두로 한 남부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금단의 섬’
사이판의 액티비티는 대부분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스노클링, 요트 세일링, 시워킹, 호핑 투어 등 여행 일정 내내 즐겨도 모자랄 만큼 해양 액티비티가 다채롭다. 그나마 산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액티비티로 타포차우 산을 사륜구동 자동차를 타고 둘러보는 정글 투어가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사이판 남동부에 자리한 포비든 아일랜드를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발길을 쉬 허락하지 않는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 CIA의 훈련 장소로 사용되면서 주민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됐다. 그때부터 금단의 섬(Forbidden Island)이라 불리게 된 것. 그리고 오늘날에는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어 평상시엔 빗장을 걸어 잠근다. 덕분에 사이판의 숨겨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포비든 아일랜드를 만나기 위해선 조건이 붙는다. 투어 가이드와의 동행이다. 정제되지 않은 야생의 이면에는 미처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는 법이다. 포비든 아일랜드에서 즐길 수 있는 어드벤처는 트레킹과 동굴 탐험 그리고 스노클링이다. 성인 키만큼 웃자란 수풀을 헤치고,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급경사와 뾰족한 바위를 지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거센 파도를 마주하기란 첫 방문자에겐 버겁고 고되다. 개인적으로 방문하기보다 투어 상품을 통해 현지 전문 가이드와 함께 안전하게 여행하길 권한다.
포비든 아일랜드 투어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이동 시간을 포함해 총 4시간 남짓 진행된다. 오전엔 야생의 거친 대자연을 누비고, 오후에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일정을 즐기기 좋다. 호텔로 픽업 온 차를 타고 투어 사무실로 이동해 간단한 안전 교육과 면책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투어는 시작된다. 일정 부분 스릴을 담보하는 투어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컨디션을 파악하고, 안전사고에 대한 우려와 책임을 인지한 뒤 투어를 진행해야 한다. 투어 복장으로는 긴 옷과 트레킹용 운동화를 추천한다. 래시가드를 입고 그 위에 반팔, 반바지를 껴입는 것도 방법이다. 간혹 바닥이 딱딱한 아쿠아 슈즈를 무료 대여하기도 하는데, 자칫 미끄러져 발목을 다칠 수 있어 개인 운동화를 지참하는 게 낫다. 구명조끼와 스노클링 장비도 무료로 빌릴 수 있다.
산 넘고 물 건너 야생의 품 안으로
라오라오 베이 동쪽 끝, 가파른 절벽 아래 포비든 아일랜드가 숨어 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망망대해 위에 홀로 서 있는 게 아닌 사이판 본섬과 기암괴석 바윗길로 이어져 있다. 우선 포비든 아일랜드를 만나려면 사륜구동차를 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언덕 위 전망대로 향한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없던 체증도 쑥 내려가게 할 만큼 시원하기 그지없다. 광막한 태평양과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섬의 비경은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포비든 아일랜드는 우리 눈에 어딘가 익숙하다. 제주도 성산일출봉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것처럼 닮아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개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야생이라는 점 정도다.
언덕을 내려가며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두 발에 단단히 힘을 주고 30분 남짓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는 일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무성하게 엉킨 수풀을 헤치고, 뾰족하게 날을 세운 바위와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할 만큼 가파른 급경사가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문득 트레킹 시작점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간판의 경고문이 떠오른다. 큼지막하게 붉은 글씨로 “Your life may be at risk” 영문 아래 “당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라는 한국어 번역이 꼭 나를 향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장쾌한 수평선과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 목덜미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이 거친 산행을 만회하는 값진 보상으로 다가온다.
잠시 숨 고르기를 마치고, 거친 바위틈 사이에 숨겨진 히든 케이브(Hidden Cave), 비밀의 동굴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맨손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바윗길을 올라야 하는 난코스다. 물론 가이드의 도움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어디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지 지점을 정확히 짚어주기에 안내에 따라 조심조심 내딛기만 하면 된다. 이후 사람 1명이 간신히 들어갈 법한 좁은 바위 틈새를 비집고 한발 한발 조심히 내려가면 비로소 현지인도 잘 모르는 숨겨진 명소, 비밀의 동굴에 들어선다. 깜깜한 동굴 안에는 샘처럼 맑은 웅덩이가 고여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 좋은 천연 수영장 역할을 한다. 언뜻 고생스러운 과정에 비해 평범한 동굴 풍경이 살짝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바위 틈새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동굴 밖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물에 몸을 담그다 보면 이내 꽤 신비롭고 흥미로운 체험임을 실감하게 된다.
사이판의 숨겨진 스노클링 명소
동굴을 빠져나와 포비든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스노클링을 즐길 차례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의 8할은 스노클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판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노클링 명소 마나가하 섬보다 포비든 아일랜드에서 더 많은 물고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자연보호구역으로 관리된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이판에서 가장 많은 열대어 종이 서식하고 있다니, 기대감이 상승하지 않을 수 없다.
포비든 아일랜드의 스노클링 포인트는 섬과 해안을 잇는 갯바위 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 풀이다. 앞서 소개했듯 사이판의 동쪽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의 끝부분에 자리해, 조류와 파도가 매우 강하다. 포비든 아일랜드의 주변 파도 역시 높기는 매한가지. 그나마 섬과 섬 사이에 커다란 바위가 거친 파도를 막아줘 물살이 비교적 잔잔해 스노클링을 즐기기 제격이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물속 세상은 그야말로 화려한 색을 뒤집어쓴 물고기 천지다. 준비한 스노클 장비를 차고 물에 뛰어들자, 눈앞으로 크고 작은 물고기가 피하는 법도 없이 신기한 듯 다가온다. 운이 좋으면 바다거북도 마주칠 수 있는데 아쉽게도 나에겐 그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팔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스노클링을 즐기다 보면 종종 몸이 훅 떠오르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주변 파도의 영향 탓인데, 구명조끼를 꼭 착용하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포인트에서만 스노클링을 즐기는 것이 안전하다.
거친 야생을 헤치며 모험을 만끽하는 포비든 아일랜드가 부담스럽다면, 상대적으로 코스가 쉬운 올드 맨 바이 더 시(Old Man By the Sea) 트레킹을 추천한다. 이곳은 산행과 산책 그 중간 느낌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숨은 트레킹 명소로, 정글을 탐험하듯 초록 숲을 천천히 걷다 보면 그림 같은 절경의 해변이 선물처럼 등장한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의 캠핑 장소로 사랑받는 이곳은 거대한 할아버지 얼굴 형상을 한 바위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해변을 지키고 서 있다. 더없이 훌륭한 피사체를 배경으로 멋스러운 인증샷을 남길 수 있어 한번쯤 방문해봐도 좋겠다.
‘사이판까지 와서 왜 사서 고생하나’라 묻는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노라고 답하겠다. 평소 경험해보기 힘든, 심장이 두근대는 희열과 모험을 만끽하고 싶다면 사이판의 포비든 아일랜드가 충분히 만족스러운 선택지가 되어줄 것이다.